다다이즘 [Dadaism]예술운동 | 브리태니커

20세기 초반 주로 취리히와 뉴욕·베를린·쾰른·파리 및 독일의 하노버 등지에서 활발했던 허무주의적 예술운동.

이 운동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이 '다다'(또는 다다이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설에 따르면, 1916년 취리히에 후고 발이 운영하는 볼테르 카바레(카페)에서 장 아르프, 리하르트 휠젠베크, 트리스탄 차라, 마르셀 장코, 에미 헤닝스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와 반전주의자(反戰主義者)들이 모임을 가지곤 했는데 한번은 프랑스어-독일어 사전에 끼워져 있던 종이 자르는 칼이 우연히 '다다'라는 단어를 가리키고 있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단어가 정통주의 미학에 반기를 든 자신들의 예술활동과 반전운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채택했다고 한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을 혐오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절망하여 이같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후에 다다이즘 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이 예술경향의 선구자였으며 마침내 대표적인 다다이즘 작가가 된 인물로 마르셀 뒤샹이 있다. 그는 1913년에 최초로 기성자료를 이용한 작품인 자전거 안장에 바퀴를 올려놓은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뉴욕 화랑 '291'과 월터 아렌스버그의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다다이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이 두 사람은 다 부유한 예술 후원자였다. 미국의 다다이즘 운동은 취리히의 다다이즘 운동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생겨났지만 비슷한 성격을 지녔으며, 맨 레이와 모턴 샴버그 및 프랜시스 피카비아 같은 예술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은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블라인드 맨〉·〈롱롱 Rongwrong〉·〈뉴욕 다다〉 같은 정기간행물을 통하여 당시의 미학적 규범을 타파하려 했다. 피카비아는 미국과 유럽을 왕래하면서 뉴욕·취리히·파리에 있는 다다이즘 예술집단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는 1917~24년에 바르셀로나·뉴욕·취리히·파리에서 다다이즘 잡지 〈291〉을 발행했다.

취리히 다다이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휠젠베크는 1917년 이 운동을 베를린에 소개했는데, 그곳에서는 다다이즘 운동이 좀더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독일 예술가로는 라울 하우스만, 한나 회흐, 게오르게 그로스, 요하네스 바더, 휠젠베크, 오토 슈말하우젠, 빌란트 헤르츠펠데와 동생 존 하트필드(정식 이름은 헬무트 헤르츠펠데인데 독일 국수주의에 항의하여 영어식으로 이름을 바꿈)가 있다. 이 예술가들이 주로 썼던 표현수단은 풀로 붙인 사진 조각에 글자로 된 메시지를 덧붙이는 사진 몽타주 기법이었다. 존 하트필드는 특히 후기의 반나치 작품들(예를 들어 〈카이저 아돌프〉)에서 이 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썼다. 뉴욕·취리히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를린의 다다이즘 예술가들도 공개 모임을 주최하고 기괴한 광대짓으로 청중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들도 역시 〈다다 클럽〉·〈데르 다다〉·〈사람마다 자기 축구공을 Jedermann sein eigner Fussball〉·〈다다 알마나흐〉 등과 같은 간행물을 발간했다. 제1회 국제 다다 박람회는 1920년 6월 베를린에서 열렸다.

다다이즘 활동은 독일의 다른 도시에도 번져갔다. 1919년과 1920년 쾰른에서 이 활동에 참여한 주요인물은 막스 에른스트와 요하네스 바르겔트였다. 하노버의 쿠르트 슈비터스도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했는데, 그는 자신의 콜라주와 구조물 및 문학작품을 메르츠(Merz)라고 이름붙였다. 슈비터스는 예술작품을 창조할 때 다다이즘적인 소재(하찮은 잡동사니들)를 사용했지만, 다다이즘의 반예술적 특징과는 달리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학적 효과를 거두었다. 파리의 다다이즘 운동은 창시자의 한 사람인 시인 트리스탄 차라의 영향을 받아 미술보다는 문학에 역점을 두었다. 다다이즘 계열의 무수한 소책자와 평론지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리테라튀르 Littérature〉(1919~24)였다. 이 잡지에는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리프 수포, 폴 엘뤼아르, 조르주 리브몽 데세녜의 글이 실렸다. 그러나 1922년부터 다다이즘 운동은 시들기 시작했고, 참여자들은 초현실주의 로 그 방향을 바꾸었다.

다다이즘은 20세기 예술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허무주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사회비판과 예술의 형식상의 모든 인습을 무차별 공격하는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후계자는 없었지만, 기괴하고 불합리하고 환상적인 것에 몰두하는 태도는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열매를 맺었다. 우발적이고 우연한 성질을 띤 다다이즘 예술가들의 창조기법은 나중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적 표현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개념예술도 역시 다다이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술가의 정신활동('지적 표현')이 창조된 물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맨처음 주장한 사람은 바로 마르셀 뒤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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