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하나의 예술로서 열렬히 옹호했으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람회를 통하여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1902년 그 당시의 전통적인 사진술에 반대하는 독창적 단체인 사진분리파(Photo-Secession Group)를 결성했다. 스티글리츠의 걸작 사진들은 부인 조지아 오키프를 찍은 400점에 달하는 일련의 작품과 감정을 시사하는 구름 형태에 관한 연구이다. 사업을 그만둔 모직상인 에드워드 스티글리츠의 큰아들로 뉴욕에서 초기 교육을 마친 뒤, 자녀들의 상급학교 교육을 염려한 부모를 따라 1881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1883년 스티글리츠는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 종합기술학교에 등록했으나 몇 달 뒤 작은 사진기를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계공학을 포기하고 사진화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베를린에서의 학창시절에 그가 사귄 친구 중에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사진을 회화와 버금가는 창조적인 예술의 매개체로 인식시키기 위해 힘쓰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인정을 얻는 최상의 방법은 사진의 권위자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사진에 가장 높은 기준을 설정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상과 메달을 획득해야 된다고 단순하게 믿었다.

189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만든 그의 초기 작품들(1883경~1910)은 이같은 목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당시 실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꾸준한 기술적 혁신이었다. 예를 들면 19세기말 그는 눈·비가 내릴 때 또는 저녁 때 처음으로 성공적인 사진을 만들었고,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사진기의 사용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도했다. 1910년까지 이 사진들은 많은 중요한 상들을 받았다.

자신의 초기 명성만으로는 사진을 예술로서 인정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 개인의 활동보다는 집단활동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사진조직에서 주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통합하여 여러 차례 모험을 시도한 뒤 1902년 사진분리파라는 자신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했다. 이 명칭은 당시에 전통적인 예술세계에 저항하고 있던 독일의 분리주의파(Secessionist) 화가들에서 따온 것이며, 스티글리츠는 단체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상에 헌신한 재능 있는 미국 사진작가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1905년까지 사진분리파에게는 그들의 작품을 전시할 장소가 없었다.

1905년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적극적인 권유로 스티글리츠는 이 단체가 자체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뉴욕 시에 자리잡은 이 화랑은 처음에는 '사진분리파의 작은 화랑'(Little Galleries of the Photo-Secession)이라고 불렸으나 곧 화랑이 위치한 거리의 번지수 '291'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스티글리츠는 자신을 화랑과 거의 동일시하여 때때로 자신의 개인적인 서신에 '291'이라고 서명했다.

이 단체를 설립한 뒤, 스티글리츠는 현대미술운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현대적 동향을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매력적인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913년의 유명한 아모리 전시회는 종종 미국에 현대미술을 소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1908년에 이미 스티글리츠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했고, 계속하여 아모리 전시회 이전 5년 동안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앙리 루소,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전을 개최했다.

더더욱 혁신적인 것은 생존해 있는 미국 예술가들도 똑같이 중요하며,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중요한 예술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스티글리츠의 열렬한 신념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현대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동일한 기간에 미국 화가 존 마린, 마스던 하틀리, 아서 도브, 앨프레드 모러, 막스 웨버의 작품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17년 '291'이 문을 닫기까지 그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엘리 나들먼, 그리고 화가 프랑수아 피카비아, 지노 세베리니, 스텐턴 맥도널드 라이트, 1924년 그의 아내가 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미국인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전시회는 적의와 조소적인 대중들이 관람했다. 그 격렬했던 세월의 역사는 스티글리츠가 편집·발행한 급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잡지 〈카메라 워크 Camera Work〉(1903~17)에 기록되어 있다. '291'과 〈카메라 워크〉는 둘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1917년 막을 내렸다. 화랑이 문을 닫게 되자 스티글리츠는 '291'에 관여하는 동안에 소홀히 했던 자신의 사진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의 관심은 젊은시절의 기술적인 면과 광범위한 주제에 열중했던 것으로부터 그의 여름휴양지였던 조지 호숫가나 뉴욕 시내의 집에서 날마다 생활하면서 보는 대상에 대한 밀도 깊은 작업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1917~37)에 진행된 2가지 작업은 각각 400점 이상의 사진들로 구성된 일련의 연재물인데, 이것은 흔히 그의 가장 뛰어난 사진들로 여겨진다.

이 일련의 연재물은 조지아 오키프의 초상화와, 모든 가능한 감정적 경험과 대응할 수 있는 구름의 추상형태에 대한 사진들이다. 그는 이 2가지 일련의 작품들에서 계속 사진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그는 사진에 대해 열중해 있으면서도 미국 화가들의 전시회를 계속 열었는데 그들이 생계를 마련하면서 하고 싶어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때 조소의 대상이었던 유럽 예술가들이 당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이후로는 그들을 위한 일은 그만두었다(그는 장사꾼이 아니였으며, 예술가들을 위한 활동으로 결코 재정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음). 사망할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의미 있는 예술이 미국에 존재한다고 믿었고, 미국의 예술가들(주로 찰스 데무스, 도브, 하틀리, 마린, 오키프)이 이러한 희망을 성취하도록 장려하는 데 늘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념은 '291'(1905~17), '친밀한 화랑'(Intimate Gallery : 1925~29), '미국의 공간'(American Place : 1929~46) 등 3개의 화랑에서 열린 175회 이상의 전시회에서 나타났다(1905~46). 그는 죽기 전에 미국의 미술이 진실로 독자적인 지위와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풍토를 바꾸어놓았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미술관이 지닌 사진에 대한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의 사진들은 보스턴·뉴욕·워싱턴의 주요미술관에 예술작품으로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최초의 작품들이었다. 이들 미술관에서 그의 사진들은 평면적인 시각예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걸려 전시되었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이며 정확한 안목과 융통성 있고 탐구심이 풍부한 마음과 혁신적인 신념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도전적 기질을 지녔다. 거의 혼자서 사진뿐만 아니라 회화와 조각 분야에까지 자신의 조국을 20세기의 예술세계로 진입하게 했으며 처음으로 전시회를 통하여 대중을 가장 현대적인 예술에 눈뜨도록 일깨웠다.

자신의 화랑에서 사진기와 펜, 그리고 격렬한 열변으로써 19세기 이래 주로 유럽 학자들을 모방하는 데 한정되어 있던 자기만족적인 예술전통을 멀리하도록 미국인들을 지도했으며, 당대의 미국 예술가들을 국제 예술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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