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추도사] 소설가 정찬주

2010.03.12 15:08 | 법정스님 | 야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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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추도사]  소설가 정찬주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스님의 속가 외사촌 조카인 현장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님을 길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상경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현장 스님도 목이 메고 저도 목이 멨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온 몸으로 살고, 온 몸으로 죽어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은 초등학교 때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꿈도 꾸어 보고,
청년기에는 인간 실존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동족끼리 피 흘린 6ㆍ25전쟁은 스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속은 스님이 살아야 하는 번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효봉 선사의 제자가 됩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에는 한 아주머니가 장경각의 고려대장경판을
‘빨래판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스님은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강원을 마치고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합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은사 다래헌에서 사십니다.
현대문학에 ‘무소유’를 발표하시어 문명을 떨치시기도 하고,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투쟁에도 간여합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스님을 몇 달 동안 잠 못 이루게 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가 죄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만행을 보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깊이 자책합니다.
어떤 운동도 인격 형성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가 불일암을 짓고 텅 빈 충만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불일암마저 번다해지자 강원도 산중 오두막으로 가 정진하시는 한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를 창건하시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내면을 조금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 ‘서편제’ 조조 프로를 보시면서 맑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소년기부터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을 견디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거름 삼아 깨달음의 꽃을 피우신 분입니다.
중학교 때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던 스님.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을 떠나기가 아쉬워 울었던 스님.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고방 호롱불로 ‘주홍글씨’를 읽다가
야단 맞고 유난히 좋아했던 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렸던 스님.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서 정진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禪)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맑은 모습 속에 한국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 동자도 만나시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 다한 일들 이루소서.




정찬주 합장




류시화-지금은 모든 논란을 접고 슬픔으로 문을 닫아 걸 시간입니다.

2010.03.16 00:56 | 법정스님 | 야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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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때로 우리를 더 깊어지게 합니다.
슬픔은 우리의 영혼을 순수의 자리로
더 가까이 가게 해줍니다.
그것이 슬픔이 가진 힘입니다.

법정 스님께서 '말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모든 책을 절판시키라 했다는
유지가 공개되면서 그 문제를 놓고
갈수록 시끄러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애도의 기간입니다.
모든 논란을 접고 슬픔으로
문을 닫아 걸 시간입니다.








"깨진 종처럼 침묵하라."
언젠가 스님과 지방 여행 중에
어느 박물관에 놓인 깨진 종을 가리키면서
스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스님이 세상을 떠난 이 며칠,
우리 모두는 깨진 종과 다름 없습니다.
깨진 종이 소리를 내면 시끄럽기만 할 뿐입니다.

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책 절판의 뜻을 전하셨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두말없이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길상사나 맑고향기롭게측에서는
거듭 언론에 이 사실을 발표할 것이 아니라
해당 출판사 발행인들을 불러
따듯한 이해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출판사 발행인들은 스님의 글과 사상이
널리 전해지도록 최선을 다해 오신 분들이며
스님과의 인연이 각별했던 분들입니다.
이 덧없는 절판 소동에서 그분들이
마치 이익과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로
오해받는다면 옳지 않으며
스님께서도 원치 않으시는 일입니다.
스님께서 살아계실 때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저는 저의 이름으로 엮은
스님의 책 <산에는 꽃이 피네>와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 대해
아무 이의 없이 스님의 유지를 따를 것입니다.







어제 14일 밤, 비를 맞으며
스님의 유해가 길상사에 도착했습니다.
그 육신은 한줌의 재로 남았지만
아직 스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뭣하러 49재를 지내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스님의 혼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말의 세계를 떠나 오로지 침묵으로 존재하는
그분과 우리가 침묵으로 내밀히 대화할 시간입니다.
적어도 49재가 끝날 때까지,
우리 모든 논란을 접고
애도와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서귀포에서 마지막 겨울을 나시면서
저와의 대화 중에 스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사윤회의 사슬을 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불교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상기시키자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생에 살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고 신세를 졌다.
다시 태어나 그 빚을 갚을 것이다."
그 말씀과 결연한 의지에서
저는 참된 보살의 면모를 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병을 떨치고 일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시면서도
늘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그동안 병치레하느라
신세진 많은 사람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법정 스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 글이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주에 인도로 떠납니다.












당신은 행복한가?


올 겨울 나는 석창포와 자금우,
이 두 개의 작은 화분을 곁에 두고
눈 속에서 지내고 있다.
초겨울 꽃시장에서 천 원씩을 주고
데리고 온 살아 있는 생물이다.
석창포 분에는 조그만 괴석을 곁들여
수반에 두어야 어울린다.
자금우는 차나무 잎처럼 생긴 그 이파리와
줄기에 매달린 빨간 열매가 아주 잘 어울린다.
이 두 개의 화분이 없다면
겨울철 산방은 춥고 메말랐을 것이다.
밝은 창문 아래 두고 이따금 두런두런 말을 건네고
눈길을 마주하다 보면 우리는 남이 아닌 한 식구가 된다.

이 애들이 내 겨울을 향기롭게 받쳐주고 있다.
며칠 전 받은 뒤늦은 편지에
스님은 요즘 행복하냐고 불쑥 물어온 사연이 있었다.
이 물음을 받고 나는 세삼스레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기준도
행복 여하에 달린 거라고 생각된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일을 생각한다.
이것이 행복의 기초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한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예쁜 찻잔을 골라주고,
밑반찬을 만들어주고, 손녀를 안아주는 일에서
그날의 행복을 누린다.
며느리를 귀엽게 여기고 사랑하는 그 마음에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행복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다.
어떤 어머니는 애들 아버지가 퇴직을 하면
고향에 돌아가 된장을 맛있게 담아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다.

벌써부터 '솔바람 맑은 물 OO된장'이란 이름도 지어 놓았다.
전해 듣는 마음도 싱그러워진다.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해진다.
현대인들은 행복의 기준을 흔히
남보다 많고 큰 것을 차지하고 누리는 데 두려고 한다.
수십억짜리 저택에, 또 몇 억짜리 자동차에,
무슨무슨 회원권을 지녀야 성에 차 한다.

물론 행복은 주관적인 가치이므로 한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할 줄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가르침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13세기 독일의 뛰어난 신학자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들과 정을 나누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들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창포와 자금우 화분을 햇볕을 따라 옮겨주고
물뿌리개로 물을 뿜어주면서
그 잎과 열매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앉아 돌솥에서
찻물이 끓어오르는 '솔바람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을 때도 내 가슴은 따뜻해진다.

한밤중 이따금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다.
창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었을 때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흰 것을 보면 내 가슴이 또한 따뜻해진다.

이른 아침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밖에 나가 
눈 위에 토끼나 고라니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볼 때 내 가슴은 따뜻해진다.







한 해가 저물 무렵 편지 꾸러미를 풀어 챙기다가
뜻밖에 이제는 고인이 된 친지의 편지를 발견하고
한 줄 한 줄 사연을 읽어 내려갈 때,
다시는 더 만날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를 두고
덧없는 인생사를 되돌아보면서 내 가슴 한쪽에는 애틋한 흐름이 있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이웃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고 사람 된 도리를 지켜갈 수 있다.

영국 속담에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옳은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비슷한 여건 속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처지에 고마워하고
만족하면서 밝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평과 불만으로 어둡고 거칠게 사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더 물을 것도 없이 나는 행복의 대열에 끼고 싶지
불행의 대열에는 결코 끼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내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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