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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modernism]문학 | 브리태니커

현대문학의 여러 경향 중에서 특별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유파.

이를테면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유물론적 경향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세계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로 해석하고 배격했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서양 어디에서나 널리 쓰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영미 비평계에 치우친 명칭이다. 유사한 문예사조가 독일에서는 흔히 '전위주의'(Avantgardismus)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영어로 '모더니즘'이라 번역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에 해당하는 상징주의 예술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영미계통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을 들 수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중심무대의 하나가 런던이었고 그 주도적인 인물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과 정신분석의 새로운 사상들에 자극을 받은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주도했다. 낡은 시적 전통에 대항하여 이미지스트들은 목가적인 정감이나 제국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를 정련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시와 비정형시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화가이자 작가인 W. 루이스의 '소용돌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입체파의 추상기법과 그들의 그림·조각·문학에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들의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 들의 기법을 결합시켰다. 그 잡지명부터 눈길을 끄는 〈돌풍 : 위대한 영국의 소용돌이 평론 Blast : Review of the Great English Vortex〉은 소용돌이파의 대변지였으며 그 편집자인 루이스가 가장 적극적인 선전자이자 대표자였다. 1914년 〈돌풍〉에 게재된 그의 실험희곡 〈별들의 적 Enemy of the Stars〉과 실험소설 〈타 Tarr〉는 넘쳐 흐르는 충일감으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생생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의 첫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이 볼 때 전쟁의 엄청난 참화와 공포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전래의 형식과 문체를 패러디화하게 되었는데, D.H. 로렌스와 T.S. 엘리엇이 그 대표자들이다.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H.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질병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 있다. 전래의 소설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은 그의 매우 혁명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황무지 The Waste Land〉 등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함과 현대적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D.H.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T.S. 엘리엇은 종래의 시 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포기와 자기극기에 의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판이한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 및 온정주의와는 달리 E. 파운드(1920년 영국을 떠나 1925년 이탈리아에 영구적으로 정착함)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영미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반민주적 관점이 모더니즘 운동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던 반동적 성향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비극적인 균형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E.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난해한 심상서사시 〈칸토스 The Cantos〉(1917~70)와 루이스의 정치·신학 소설 〈인간의 시대 The Human Age〉의 문학적 공로에 대한 평가와 그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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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시미술 - 신비에 싸인 기원

위의 제목의 원시(Primitive)라는 용어는 '미개인' 또는 그들이 우리보다 단순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거쳐온 문명 이전 상태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는 뜻에서 사용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 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원시인들은 무엇이 그림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주술적인 힘을 빌리려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괴이한 모양의 물건들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는 과정에서 이른바 부조라는 것을 창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항(풍요와 다산이 아닐까?)을 작품에 실어서 표현한 것임을 추측 할 수 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빌렌도르프 비너스 Willendorf, Venus of(기원전 25000∼20000)

1909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여성나상(女性裸像). 빈의 자연사박물관 소장.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7개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에서 제2의 9층(層) 문화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발견된 여러 개의 유물 중에서도 가장 알려져 있다. 여성나상은 2개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높이 10.3 cm의 석회암제이고, 다른 하나는 19 cm의 상아제이다. 유방·복부·둔부 등이 극단적으로 과장된 이 나상은 생식·출산(
풍요다산)을 상징하는 주술적·원시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 시기는 오리냐크기(期)에 속한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이 중에 현저한 유적들은 1912년에 프랑스에서 베구엥이 발견한 뒤끄·도두베르 동굴, 1923년에 가스트레가 발견한 몽떼스빵 동굴, 1927년에 마르땡이 답사한 르·로끄·드·세르 동굴등이다. 그리고 1940년에 이 고을의 소년들이 발굴한
라스꼬 동굴은 유명하다.

예술이란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일반적으로 지식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화가가 보고 또 알고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느낀 것에 더 흥미를 가지는가에 따라 그림도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인류가 채집경제에서 벗어나면서 질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종교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의 작품, 스톤 헨지 (기원전 15~19세기경, 영국)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면서 초인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스톤헨지는 태양숭배의 기념물이다.) 이와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와 작업에 있어서의 노동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는 힘은 바로 종교적인 것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여기서 그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미술 또한 우리에게 생활과 연계하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원시적 주술의 유효성을 보이는 사나움은 구석기 시대의 수렵 주술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충실함과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영웅들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새를 머리에 얹은 남자상(BC 19~20C, 뉴기니의 세픽강유역), 수호자상(19~20C, 가봉)을 예로 들 수 있겠는 데, 이들의 공통점은 그 시기에 있어서 정령이 깃드는 곳이라는 믿음을 지녔던 곳이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2. 이집트 미술 - 영원을 위한 미술 (B.C.3000 ~ 300)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바야흐로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왕이 통치하는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도시와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
회화였다.
이 작품들을 볼 때, 형상에 거의 사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영효과가 없고, 벽에 밀착된 것처럼 평면적이고 형상의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약화법으로 간단히 그려진 단순화된 형상들은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후생활에 있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만들고 천으로 그것을 싸서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견고한 관에 넣었다.
또한 이집트인은 죽은 사람의 영혼도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활용품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일상의 자재도구등을 분묘에 비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분묘에 매장이 불가능한 것은 묘실의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분묘가 건축, 조각, 회화의 거의 모든 것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문자 그대로
死者를 위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중왕국 시대에 히크소스족의 침입으로 테베라는 도시를 제외한 전 이집트의 지배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1570년경 테베의 군주들은 침략자를 축출하고 이집트 전토에 통일된 지배권을 되찾았는데, 이와 같은 이집트 황금시대의 도래를 신왕국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 시대의 미술의 특징은 2000년 전에 정립된 회화 및 조각의 엄격한 규칙을 답습하고 있기는 하나, 때로는 대담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규모에 있어서 아주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도 엿볼 수 있다.
헤시라의 분묘에서 보았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전작에서 발견되지 못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전의 미술 작품을 지배하고 있던 모종의 질서에 대해 상당부분 자유로와 졌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측면과 정면 시선이 서로 교차되고 있었던 고왕국 시대의 작품에 비해, 측면 시각의 사용을 억제한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아크나톤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지는 데, 이는 수도를 옮기면서 활기찬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장려하였다.
아크나톤의 부조상을 보게 되면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흉상에서도 볼 수 있다.
채색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움과 사실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크나톤 Akhnaton (?~?)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왕(재위 BC 1379∼BC 1362).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라고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며 왕비는 네페르티티이다.
당시 이집트는 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펼쳤으며, 나일 계곡에는 많은 외국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왕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의 세계종교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노모스[州]에도 속하지 않는, 태양을 상징으로 한 유일신(唯一神) 아톤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수도 테베는 주신(主神) 아몬의 사제(司祭)들이 권력과 막대한 부(富)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치세 6년째에 자신의 이름을 ‘아톤에게 이로운 자’라는 의미인 아크나톤으로 개명하고 테베를 버린 다음, 새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기고, 아케트 아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전국의 신전·기념비·무덤에서 아몬의 이름을 지웠다.
왕은 명상에 빠지고 아톤 찬가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왕의 이상은 이해받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몬 신앙은 부활하였으며,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졌다.
그러나 자연과 진실을 중시하는 아톤의 가르침은 사실적이고 명쾌한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양식은 이크 응 아톤의 타계 후에 다시 아몬 신관들이 득세 했을 때에도 볼 수 있는 데, 그 예가 바로 투탕카멘의 묘이다.

투탕카멘 Tutankhamen (BC 1370~BC 1352 ?)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동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왕묘가 테베의 서쪽 교외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이 묘가 발굴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3. 메소포타미아

기원전 3500년경에서 3000년에 걸친 기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태동시킨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는 모두가 신의 소유로서 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신관이 모든 국가의 행정을 통치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메르의 조각은 건축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데 그것이 바로 돌로 된 소형 인물상군이다. 수메르의 조각가는 소재에 있어서 금속이나 나무를 소재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문자시대, 수메르 문명

아카디안
왕조

우르 왕조

바빌로니아
문명

아시리아
문명

신바빌로니아
왕국

페르시아
제국

B.C.
3500

B.C. 2350

B.C. 2150

B.C. 2000

B.C. 900

B.C. 612

B.C. 538

B.C.
331

 

4. 바빌로니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이라크의 남부를 바빌로니아라고 했다.
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 인들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시켰다. 수메르 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예술·종교·문학에 있어서도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기술을 지혜의 화신인 에아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천년 초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앗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한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을 붙여 치장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와 총안이다.
또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고 하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장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돌 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한 이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붉은 색과 검은색과 칠했으며, 청·황·녹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서임식·사자의 사냥 장면등을 묘사한 것으로 릴리프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 모습, 몸통은 앞 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기원전 5천∼3천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로 주제도 흥미롭고 완성품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그 외에 조개나 유리·돌·상아로도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5. 앗시리아 (기원전 1,000년경 ∼ 612)

앗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슈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6. 에게 미술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이며, 에게 미술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
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마리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7. 그리스 미술

북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동해 온 도리아족은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이들의 문화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더하여, 서양 문화의 모체인 눈부신 그리스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스인은 초기에는 이집트인처럼 형태를 중시한 개념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각했고, 또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를 발명한 그들의 마음 밑바닥엔 현실의 인간을 모든 세계관의 척도로 하는 사고법이 있었다.
이 정신이 미술을 형식주의에서 탈피시켜 바로 자연주의에로 이행시켰던 원인이었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이상미, 조화미, 균형미를 추구하고 인간 중심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으로는 신전 건축이 중심이고 조각은 수학적인 비례에 의해 인체의 이상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스 미술은 서양 미술의 근원이라 칭한다.

그리스 미술은 세 시기로 구분한다.


1.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세기~6세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의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인상 조각으로 대표된다. 정면성의 법칙, 치졸한 안면 표정, 이른바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미소를 특색으로 한다.
아르카익 초기의 조각은 강한 정면성(正面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코레의 '소녀상', 코우로스의 '청년상' 등이 대표적이다.
아르카익 시대 중기로 가면 주제와는 관계없는 가로 기어 다니는 뱀이나 괴수를 박공벽 끝의 좁은 공간에 넣어 공간을 해결하였다.
이 시대의 말기로 가면 그리스 미술 특유의 충실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묘사가 더해져서 아르카익 초기의 구성주의는 뒤로 밀려 나갔다.
그것은 아르카익 스마일의 소실이고, 유각(遊脚)의 탄생이었다.


2. 클래식(고전) 시대(기원전 5세기~4세기)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의 클래식(고전) 시대에는 조화미, 이상미를 추구한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였다.
아르카익에 나타난 그리스인의 창조력은 클래식 시대로 가면 묘사주의의 확립을 가져왔다.

이 클래식 시대의 전기에는 저명한 3인의 조각가가 있었다.
뮈론, 페이디아스,폴뤼클레이토스이다.
뮈론은 운동의 순간적인 자세를 표현하는데에 재능을 발휘했다. 감정의 절제된 운동미를 잘 표현한 '원반 던지는 사람' '아테네와 마르쉬아스'에서 볼 수 있는 뮈론의 의도는 예리한 관찰에 의해 인체의 구조를 밝히며 그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디아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서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 조각', '렘노스 섬의 아테네 여신상', '아테나·렘니아'는 이런 페이디아스의 특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페이디아스의 이런 정신 내용을 드높이려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폴뤼클레 이토스이다. 그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미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데에 그리스인의 이지적·합리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신전 건축은 장중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과 우아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신전이 발달되는데 도리아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의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오니아식 신전의 대표적인 것으로 '에렉테이온 신전' 과 '니케 신전' 이 있다.


3. 헬레니스틱 시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의 헬레니스틱 시대는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화려한 미를 추구했다.
격동적이고, 극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클래식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사실 묘사가 행해져 초상 조각이 발달하기도 하고, 소재 범위도 확장되어 노인·다른 인종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동물들과 그 밖에 세속적인 것들이 다루어진다.
관능적인 묘사로서는 많은 비너스 상이 있는데 헤르메스와 '크니도스의 비너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8등신의 비례미를 잘 표현한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운동감을 주는 표현으로는 사모트라케에서 출토되어 날개·옷주름등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착각을 강조한 '니케 여신상', 격정의 표현으로는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의 부조', 다른 인종과 결합한 것으로는 '죽어가는 갈리아 인', '자살하는 갈리아 인과 그의 부인' 등의 조각이 있다.
헬레니스틱 문화는 서로는 로마에 유입되어 서양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동으로는 인도에까지 이르러 간다라 미술과 아쇼카 왕 치하에서의 불교 미술을 탄생시킨다.

 

 

 

8. 로마미술 (기원전 1,000년 ∼ 395)

그리이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이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이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이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이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이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이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이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이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이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이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로마인들은 멀리 북아프리카, 영국, 스페인, 페르시아만, 카스피해까지 그 들의 우수한 유물을 남기게 되었다.

1. 건축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로마인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토목공학을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의 건축은 공중목욕탕, 도로,수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자신감과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예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 중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부에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 주는 아치들인 세개의 층 각각에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의 세 가지 건축양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식 구조와 그리이스 형식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고 이 후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 건축물에 아치와 궁륭을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또다른 업적이다.

2. 조각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이스의 조각을 모방, 수집하여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마의 조각은 초상 조각과 설화적 부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초상 조각에서 그들은 전쟁 영웅의 두상을 신성의 지배력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 영웅적으로 이상화하여 제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이 인물의 미묘하고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로마의 초상조각은 훨씬 사실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확하고 의지력 있는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선조의 모습을 미이라로 만들던 풍습과 연관된 듯한 관심이 로마에도 있었는데 그것은 사자의 초상을 밀랍으로 만들던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더 견고한 대리석으로 초상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보다 더 실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초상제작에 힘썼다.
설화적 부조에서는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면을 보여준다. 그리이스 인들이 신전의 프리즈에 새겨넣었던 주제가 일상적인 행렬이었다면 로마인들은 일시적 사건을 다룸으로써 로마 조각가들의 예술적 의도가 기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인들은 부조제작에 있어서 환조처럼 느껴지게 하는 깊이감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3. 회화

로마인들이 제작한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로 로마의 회화를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조각에서 처럼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화가나 최소한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그리이스 회화의 특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이윰에서 발견된 소년의 초상은 납화법으로 그린 패널화인데, 이것은 내구성이 강한 엔카우스틱 기법(납화법. 뜨거운 납을 섞은 안료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고대 회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기원전 4세기경 파우시아스가 완성했다. 주로 천정의 패널에 조그마한 인물들을 그릴 때 사용했다.) 으로 색채가 밝고 생생하다.
이 기법은 로마 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명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태리어로 신선하다 는 뜻. 덜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에 애어들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석고가 마르 기 전에 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림의 수정도 불가능하다. 기념 건조물의 벽화 그리기에 적합하다. 건조한 지방에서 가장 영구적.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 ) 와 함께 벽장식에 이용되었다.
로마 벽화는 19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당시 묻힌 나폴리 부근의 폼페이와 그 밖의 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이들 벽화 그림에서 로마인들은 완벽한 단축법과 빛과 그림자에 의한 정교한 모델링으로 사물이 실물 과 같은 입체감을 띠고 있고 미약하게나마 원근법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에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것들보다 훨씬 깊이감이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로마의 미술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이스 미술의 전통을 잇고 그들의 미술을 수용, 모방, 수집하여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였으며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로마 미술은 그들의 정복지역의 종교와 관습등과 어울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신과 영웅들의 아름다운 형태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후대에 가르쳐 주었고, 이것은 서양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9. 중세초기 미술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 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성 피에트로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카타콤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 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2. 채색사본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를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장으로 한정된 화면 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3. 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잔틴미술<Byzantine art>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5∼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
단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敎義)·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보통 이것을 3기로 나누며,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건축】 비잔틴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千一柱]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司祭)를 위한 제실(祭室) 및 내진(內陣)과, 신도(信徒)를 위한 신랑(身廊)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縱長式: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半圓狀)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원 모양의 지붕을 씌운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天界)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洗禮堂), 묘당(廟堂),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主廊)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前室:세례 지원자용)과 앞뜰(일반인용)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6세기 수도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당건축의 상징성은 십자가를 본뜬 평면 설계에서도 보인다. 바실리카에서는 제실 앞쪽의 한 구획이 좌우로 뻗어 익랑(翼廊)을 형성하고, 라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보이며(단지 이것은 유럽에서 특히 현저하다), 집중식에서는 사방에 같은 길이의 가지를 뻗게 하여 그리스 십자가를 본뜬 것이 통례이다. 바실리카식이 비잔틴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한 데 비하여 집중식은 그리스 십자형의 설계를 고집하면서 여러 유형을 발달시켜 나갔다.

【장식미술】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聖像)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 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예술에 가깝다.

 

4. 모자이크

최초 황금시대의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노플보다는 오히려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변방이었던 라벤나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을 성 비탈레 성당의 제단 양쪽 벽면에 있는 한 쌍의 모자이크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547년경, 이탈리아의 라벤나, 성비탈레 성당) 에서 융성한 비잔틴 제국의 배경에 이루어진 화려한 유림 모자이크의 현란함을 맛볼 수 있다. 신하와 성직자 및 시녀들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비 테오도라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은 새로운 인간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726년에 이르러서 황제의 성상금지령이 발단이 되어 약 1세기동안 비잔틴 회화와 모자이크의 발달은 중단되었다. 제 2황금시대(850-1200)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모자이크에 나타난 정신화된 인간미의 이상과 휼륭하게 조화된 고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책형(11C, 다프니 수도원)은 1기 황금시대의 모자이크에서 강조된 영원성과 신성에 고전미술의 인간성과 육체적 우아함이 덧붙여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전주의의 심오한 일면은 인간적 감정의 고귀함에 있으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이스 미술에서 처음 으로 나타난 억제되고 고귀한 인간적 고통의 표현이다. 이콘icon 즉 패널에 그려진 성화상은 제2황금 시대에 수많이 제작되고 숭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성상파괴 논쟁 이전으로 소급된다.
성모자에서 보이는 미의 이념은 이전의 고전시대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데, 밀랍화 수법과 명암에 의한 모델링은 로마 초상화와의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모습의 묘사에서 천상적인 미의 이상과 조소적인 표현이 두드러 진다. 또한 기하학적 화면구성에서 연유하는 강한 인상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콘은 에술의 창의성보다는 장인적 기능에 더 의존하는 것이었다. 옥좌의 서모자와 같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후면의 광휘에서 우리는 당시의 작품이 강조했던 바를 알 수 있다.

10. 로마네스크 미술

10세기 중반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이후 세력을 잡은 오토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세력을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황제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였다.
972년에는 오토2세가 비잔틴의 테오파노 공주와 결혼하면서 게르마니아 지방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기도 했다. 또한 이시기에는 노르만 족, 헝가리 족, 사라센 족들의 침입이 종식되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고 예술활동이 활발하였다.
11세기에는 카놋사의 굴욕등,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시기였으며 성상파괴 문제로 인해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다.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대표라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 조각

로마제국의 붕괴와 함께 소멸되었던 석조조각의 부활은 11세기에 이르러 일반서민 사이의 신앙이 부활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의 조각은 로마말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형태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의 구성, 인물의 정면성, 건축적 틀속에 끼워 넣은 배치법 들은 비잔틴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프랑스 로마네스크 조각의 절정인 므와사키 수도원의 남쪽 정문 조각은 아일랜드 괴수 교차 문양의 계보에 속하기도 한다.

2. 회화

조각가에 비해 로마네스크 화가들의 그림에선 전시대로부터 그렇게 혁신적인 발전을 보이지는 않는다.
뛰어난 세밀화<복음서 기자 성요한의 가장 자리 꽃 문양은 로마 장식 모티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인물상은 칼롤링 왕조 미술과 비잔틴 미술을 모델로 삼고 있다.
또한 틀의 짜임새가 인물의 형태와 엮어져 놀라운 통일성을 낳고 있다. 이 시기의 회화에선 선적인 성격과 표면의 색조 구성사이의 일관성 있는 조화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관성 있는 의장을 태어나게 했으며 표현력에서도 상당한 진보를 보인다.

11. 고딕미술

서양의 중세는 원시적인 방식과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수도원 중심의 문화권에서 도시의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성당 중심의 문화가 도래한다.
성당은 많은 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사람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신의 완벽한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당시 중세의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중세인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고딕 양식에 있어서 모든 미술의 목적이 단지 종교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 또한 발전하고 있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고딕 양식은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를 받게 되며 이와 함께 조각, 회화, 공예까지 확대 발전하게 된다. 4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중세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는 14세기 까지를 중세로 볼 때 고딕 양식은 중세의 모든 미술 양식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 하겠다.

1. 건축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새로운 양식의 주된 특징은 실용과 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원리라고 하는 수직양식의 원리, 건축 기술상의 획기적인 발명인 교차 궁륭이라 할 수 있다.
교차적 궁륭이란 11세기 초 목조로 덮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 이후 고딕 석조 건축에서는 둥근 천장의 무게가 벽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었기에 이의 해결책으로 늑재 를 엇갈리게 가로 질러 놓는 방식이다. 건축가들은 또 궁류형 천장의 아치들을 지탱하는 데 아치만으로도 충분함을 알게 되어 기둥들 사이의 무거운 석벽을 없애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여기에 외부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뾰족아치를 사용하므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이 가능해졌다.
성당의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진다. 이것으로 성당의 정점의 높이의 조절이 자유로와졌으며 고딕 의 특징은 첨탑과 공중부벽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첨형아치와 공중부벽으로 쓸모없게 된 외벽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치장한다. 이로서 돌과 유리로 완성된 성당의 황홀한 구조는 이 전의 로마네스크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인간을 압도하고 천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기독교의 또다른 초월의 세계의 신비감을 하늘의 영광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보다 더 엄격한 구성으로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했고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건축에 옮겨 중세 교회 건축양식을 대성했다. 이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쇠퇴하다가 19세기 고딕 부활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학 공중 건물, 상용건물 등의 건축에 이용된다.

2. 조각

이 시기에 나타난 조각 양식은 성당의 양식과 같이 발달하는 데 이는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많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전형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랭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 초에 들어서 결실을 맺는다.
작품들 대부분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되는 데 로마네스크에서 보여 주었던 육중하고 엄격한 조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영웅적이고 기념비 적인 것으로부터 보다 친밀하고 복잡한 것으로, 과장된 감정 표현이 강조되었다. 연속되는 주름의 흐름과 아름다운 형상으로 발전한 고딕 조각 양식은 15세기 국제적 고딕 양식과 연결된다.

  • 프랑스

로마네스크의 조각보다 더 추상적인 초기 고딕 조각이 남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상들의 특징은 원주 자체의 견고한 원통형을 이용 환조 조각의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 조상들의 옷 주름은 금방 흐를 듯 유연하며 그 안에 생생한 육체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의 조각가들이 고대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랭스 성당의 조상은 고전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간결, 수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우미의 양식이 나타나 후기 고딕 양식의 기준이 된다. 최소한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실감나게 자기들이 느낀 방식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을 전 시대 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한 점은 이 시기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기본원형이 되기에 이른다.

  • 독일

프랑스인으로부터 조각의 전통을 전수받은 독일의 조각가들은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성당 내부에서 조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조각으로부터 자유로왔으며 훨씬 개성적인 표현을 구현하였다.
나움부르크 성당의 조상은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의 매장>에 나타낸 필사본은 인물들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되 베끼거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닌 더욱 감동적이고 생명감을 불어 넣으려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이탈리아

13세기에 이르러 고딕 조각이 이탈리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는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이북보다 훨씬 고대의 전통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조각은 덜 고딕적이었는데 고딕적이라고 불릴만한 작가는 니콜라 피사노였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옷주름의 흐름과 성실한 모델링에서 프랑스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 국제 양식

1375년과 1425년 사이에 서유럽에 전역에 퍼진 양식을 말하는데, 주된 특징은 유연한 곡선 형식으로 인위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세속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들이다.
이것은 13세기 중반 화려한 프랑스 궁정양식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15세기 초까지 번성하였다. 국제양식 조각의 알프스 북부 최대 거장으로 클라우스 슬뤼터의 작품과 알프스 남부의 기베르티의 작품이 있다.

 

4. 회화

  • 프랑스

고딕 양식에서 회화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 회화로 채워져 있어야 할 성당의 벽면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채색 사본은 화려하고 도상적인 주제를 표현한 색유리와 자리를 바꾸고 대성당의 건축과 함께 스테인드 글라스도 함께 황금시대를 맞는다. 프랑스의 회화의 중요 위치로 자리잡게 된 이 것은 1250년 이후 대성당 건축이 시들해지면서 사양길 에접어들고 다시 채색 사본이 유행하게 된다.

  • 이탈리아

벽화, 즉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는 알프스 북부에서 회화가 스테인드 글라스로 대치될 무렵, 이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회당에 유리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스코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는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3세기의 비잔틴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가 지옷토의 출현을 부른다. 그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한데, 환조라 할 만큼 공간의 깊이감, 원근법, 옷의 유연한 흐름 등은 평면 위에 가장 실감 나게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렸다.
비잔틴 회화를 이어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린 화가 둣치오는 템페라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한 장면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시정 넘치는 친밀감과 사실적이고 깊이감 있게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마르티니, 로렌쳇티 형제의 그림이 있다.

  • 국제양식

국제 고딕 양식의 첫단계는 지옷토와 둣치오의 이탈리아 자연주의에 프랑스 시모네 마르티니의 우아함 을 혼합시키고 후기 로마 회화의 고대 양식을 가미시킨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플랑드르 예술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브뢰데들람의 <신전에서의 경배> 는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패널화를 그린 랭부르 형제는 달력의 세밀화가 나타난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국제양식회화의 제 1인자인 젠틸레 디 파브리아노는 부드러운 음영과 옷주름의 유연함, 주의깊은 동,식물의 관찰은 빛이 형상이나 색채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빛의 중요성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2.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 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 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특별히 지옷토와 단테의 출생지였던 부유한 상업도시 피렌체에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흐름 이 강하게 나타났다. 피렌체는 새로운 아테네로 부상될 만큼 시민예술의 야심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예술가를 엘리트 집단 으로 인정하는 등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들 수 있으며 그는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 표현하였으며 원근법, 소실점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뒤이어 알베르티가 건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그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형식을 절충하여 개인 주택에 적용하는 건축기술을 보여 주었다.
15세기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는 로마의 유적을 제계적으로 연구한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다. <성지오르지오>나 <죽코네> 모두 고전 예술에 있어서의 균형 잡힌 움직임의 의미가 회복되었으며 고대 로마 조각을 재현, 새로운 도상으로 재창조하였다.
플랑드르 화가들의 나체상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나체상은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추구하여 인간의 상체를 구조체로 다루었으며, 옷은 신체를 감싸는 듯하게 표현되었다.
경쾌한 아치 대열과 고린트식의 기둥이 잘 표현된 천국의 문,<야곱과 이삭의 얘기>의 기베르티는 선명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 을 구사하였으며, 테라코타에 전념한 롭비아와 로마조각보다 더 개성적인 대리석 조각가 롯셀리노 도 유명하다.
다빈치의 스승인 베록키오는 사방으로 뻗쳐 있으나 우아하고 연속적인 동작을 보여주는 <돌고래를 안은 동자>를 조각했다. 베록키오는 어떤 의미에서 도나텔로의 폭넓은 세계와 대담한 예술적 야망에 필적했던 작가였다.

1. 회화

피렌체 회화는 격렬한 동세와 떨림이 강한 윤곽선을 유지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고전 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15세기 말에 유행된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짐작할 수 있는 데, 그들은 고전고대를 연구하면서 종교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것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예술,철학,종교 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을 꾀하였다.
마사치오는 26살에 요절했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는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성모와 성요한이 있는 성삼위일체>는 지옷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나텔로처럼 의복 보다는 육체를 더 중시한 르네상스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르넬레스키의 고전적 건축과 과학적 원근법의 완벽한 응용이 잘 나타나 있다.
마사치오의 <삼위일체>와 흡사한 <성모자와 성자들> 을 그린 베네치아노는 색채구사에 있어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였다. <성십자가>의 피에로 델라 프란 테스카는 빛을 이용하여 깊이감을 표현하였으며, 마사치오를 연상시키는 엄격한 자세의 인물상과 자신의 그림세계의 object를 기하학적 개념(구, 원통, 원추)으로 파악하여, 현대 추상화가들 의 정신적 지도자로 칭해질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는 이교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영성이라는 공통분모의 발견으로 높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였는 데, 이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마사치오로부터 이어지는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화가로 만테냐를 들 수 있는 데, 그는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를 중시한 지옷토에 비해 외부적인 형태에 관심을 나타냈었다. 만테냐의 <형장을 끌려가는 성야곱>은 앙각시의 원근법으로 나타내었으며 프레스코 벽화 중 가장 극적 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로마풍의 건축과 의상, 장신구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엿볼 수 있으며 긴장되고 완강한 모습의 인물상은 도나텔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특별히 나체상으로 소묘한 만테냐의 소묘로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밑그림은 나체상으로 구성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벨리냐의 <법열에 잠긴 성프란체스코>에서 웅대한 자연경관과 부드러운 색채를 볼 수 있으며, 부조 처럼 윤곽선으로 표현한 카스타뇨의 가죽그림<다윗>은 동세와 동작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코처럼 일부러 근대적 표현법을 회피한 작가도 있다.
파올로 우첼로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많이 사용하고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는 <산로마노의 대승>을 그렸고, 메노초 고촐리는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그렸는 데, 이 들의 작품들은 모두 상류계층이 작가들에게 원하는 요구에 부응할 만하다.

2. 르네상스의 주체

중세의 인간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답고 있었던 시대의 모든 미술이 창작은 종교에 묶인 채 그 나래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생각이 확대되어 나가는 시대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급속한 기술과 발달은 인간의 시각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에 영향받은 것은 단지 사회에 국한 된것 은 아니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둣치오, 지옷토, 로렌쳇티 형제와 같은 화가들에 의한 시각 예술의 융성, 단테와 페트라르카, 복카치오와 같은 문학가들에 의한 문학등의 발전드오가 같같은 전반적인 문화의 융성이 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자신들의 세기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여명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자아에 대한 보다 진보적인 노력들이 연결되었다.
위와 같이 신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지게 되자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각이 도래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대규모적인 고대 문예의 부흥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고대문예의 부흥은 특히 시각예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르네상스를 주도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교인들 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대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따른 것이 아닌, 고전적 전통을 그리스도교와 융합 시켜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던 사람들이었다.

브루넬레스키 Brunelleschi, Filippo (1377~1446.4.15)

이탈리아의 건축가·조각가. 피렌체 출생.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는 대신 금속 공예의 기술을 익혀 조각가가 되려고 하였다.
1401년 피렌체세례당 출입문의 양각(陽刻) 콩쿠르에 응모하여 L.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과 끝까지 경쟁한 결과, 결국 그가 사퇴함으로써 기베르티가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 시작품(試作品) 《이삭의 희생》(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하나하나의 조각상이 매스로서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또 그것들이 극적으로 힘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목각상 《그리스도의 책형(刑)》(1409?)과 더불어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콩쿠르 이후에 주로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첫 업적에는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대성당의 커다란 돔(36 낙성식)이 있으며,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또 피렌체의 첫 사회시설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고아양육원:21∼44)에서는 9단의 계단 위에 연속된 아케이드의 전망 효과를 노리고 있으며, 명쾌하고 새로운 율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산로렌초성당(18 이후)과 산토 스피리토성당(36 이후)에서는 저마다 질서 있고 지적(知的)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다. 후자의 본당에서는 집중식 형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데 이는 산로렌초성당의 성기실(聖器室:1428), 파치가(家)의 예배당(29 기공),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34 기공) 등에서 실현되고 있다.
특히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은 순전히 집중식 형태를 노려서 건립된 것으로 그의 건축양식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37년에 공사가 중지되어 지금은 1층 벽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에 수시로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구축(構築)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 투시도법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12.13)

이탈리아의 조각가. 본명은 도나토(Donato di Niccol?di Betto Bardi). 피렌체 출생.
F.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초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이다.
니콜로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평생 청빈한 가운데 독신으로 지냈다.
초기의 수업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1403년 말에 피렌체대성당의 문을 제작 중이던 기베르티의 조수로 일하였다.
후기 고딕에서 초기 르네상스에 걸친 과도기에서의 그의 활동은 대체로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405∼32년으로 피렌체대성당을 위한 두 예언자상(1408)을 비롯하여, 웅대한 《복음서기자(福音書記者) 요한상》(15), 병기 제조업조합의 의뢰로 제작된 오르 산 미켈레성당의 《성 조르조》(16:원작의 대리석상은 피렌체의 발제로미술관 소장), 길드 조합을 위한 《성 마르코상》, 피렌체의 문장(紋章)이 있는 방패를 들고 있는 《사자상》, 산타크로체성당을 위한 목각 《그리스도의 책형(刑)》 등을 제작하여, 고딕의 작풍을 남기면서도 이미 르네상스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여, 분석적인 사실을 억제하고 종합적인 장엄함으로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 조르조》는 그때까지 건축의 질서를 따르고 있던 조각을 3차원의 공간에서 독립시켜, 범할 수 없는 위용과 고전적인 격조를 보였다.

제2기는 32년 그가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유적 연구에 열중한 이후의 10년간으로, 발제로미술관의 청동상 《다비데》(33)는 젊음이 넘치는 육체의 표현에 고전미를 풍기게 한다. 대리석조각도 이 즈음엔 사실기교의 극치에 이르러, 발제로미술관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박진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밖에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결정적인 것으로 산타크로체성당의 부조(浮彫) 《수태고지(受胎告知)》, 산로렌초성당 설교단의 부조 《강가(降架)》 등이 있다.

제3기는 43년 파도바에게 초대되어 그곳에 머물렀던 10년간으로, 《가타멜라타 장군기마상》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걸작임과 동시에, 르네상스 주조기술의 한 정점을 나타낸다.

제4기는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만년의 피렌체시대로, 사실적 기법은 더 세련되고 전부터 조금씩 보였던 그의 괴기취향과 비극적인 표현이 강조되었다. 베키오궁전 앞에 있는 《유디트와 홀로펠네스》 청동상과 피렌체성당의 《막달라의 마리아》 등이 있다. 대리석·청동·목재·테라코타 등 온갖 재질을 썼던 그의 전작품에 일관되어 풍기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육박해오는 투철한 르네상스적인 리얼리즘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고대의 단순한 모방에서 탈피하였으며, 조각을 회화화한 기베르티의 고딕적인 작풍과도 대결할 수 있었고, 조각을 원래의 정도로 되돌림으로써 베로키오나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끼쳐 근대조각으로 발전할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3. 후기 고딕 회화

1420년 경 북유럽의 화가들과 이탈리아 화가들은 국제양식의 한계를 넘어 대담하게 전진해 갔다.
그러나 북유럽의 화가들은 과거의 전통을 고수해 나가는 경향을 고수하였는 데, 이에는 상당히 비슷한 경향이 동시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분하여 전자는 초기르네상스라고 부르고 후자를 후기 고딕양식이라고 부른다.
알프스 북부에 있어서의 예술의 경향은 기존의 경향을 고수하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처럼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음악과 회화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회화에 있어서 소위 플레말레의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노력이 확대되었다. 이것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숙한 기법을 가진 자연으로의 회귀라 하여 그들을 찬양하였다.

에이크 Eyck, Hubert van (1370?~1426)

네덜란드의 화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한 ‘에이크 형제’ 중의 형. 아우와 함께 부르고뉴공 필립[善公]을 섬겼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경력은 불분명하다. 작품으로는 형제 합작의 서명이 있는 강(Gent)의 성요한성당의 제단화(祭壇畵)가 있는데, 그의 구상에 의해 착수되고, 그의 사후인 1432년 아우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에이크 Eyck, Jan van (1395?~1441.7.9)

네덜란드의 화가. 형인 H.van 에이크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하였다. 1422∼24년 헤이그의 바이에른후(侯) 요한의 궁정화가, 이어 25년 이래 부르고뉴공(公) 필립[善公]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한때 필립과 포르투갈의 왕녀 이사벨의 결혼을 위한 사절단과 함께 리스본에 간 일도 있다(1428∼29).
종래의 양식이나 구도(構圖)에 구애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연 그대로의 리얼리즘(realism)을 주지(主旨)로 하였으며, 냉엄하고 신비적인 분위기로 종교적 경건과 신앙을 표현하였다. 또 플랑드르에 초상화 장르를 확립하였는데, 새로운 시야와 기교는 후세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무덤가의 세 마리아》 《젊은 남자의 초상》 《헨트 제단화》, 그리고 형제 합작인 강의 성요한성당의 제단화와 그 밖에 종교화·초상화 등이 많다.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

얀 아이크 형제와 더불어 플랑드르 화가 중 거장의 대열에 끼는 사람이 바로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 이다. 그의 작품 중 십자가에서 내림은 모난 옷주름과 정확한 모델링으로 플레말레의 화가의 그림 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얀 반 아이크의 부드러운 음영과 풍성한 색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있어서의 그림은 과거의 피에타상에서 볼 수 있었던 조소적인 비애가 각 인물의 표정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로제의 회화 예술은 많은 추종자를 낳게 했는 데, 이는 아비뇽의 피에타에 잘 나타나 있다.


보스 Bosch, Hieronymus (1450?~1516)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적으며, 연구자의 추정에 의하면 지금의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시에서 태어나 대부분 그곳에서 제작활동을 계속했을 것이라 한다.
작품은 후기고딕의 전통에서 출발한 초기의 그리스도 수난도(受難圖) 등 종교적 제재로부터 중기 이후에는 종교적·비유적 제재로 나아갔으며,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결부된 경이적 환상세계를 전개하였다. 이는 광기(狂氣)와 부조리(不條理)와 도착(倒錯)의 지옥도(地獄圖)이며, 합성·변모된 무수한 동물과 식물 비유기적(非有機的) 물체들로 화면을 꽉 메우고 날뛰는, 괴기하고 어두운 해학(諧謔)의 마술세계이다.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형태와 도상(圖像)은 전례가 없었으며, 20세기의 쉬르레알리슴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보스의 회화는 광기나 공상의 산물이 아니며, 당시의 신학 및 종교적 배경과 관련된 상징체계(象徵體系)를 내포하고 있다. 이 화가의 신앙고백의 기반에 관해서는 신비적인 아담파(派), 이와 대립하는 경건한 로이스브루크파(派), 금욕적인 반(反)종교개혁·인문주의의 경향에 두려는 여러 설이 있다. 그의 지옥도는 중세적인 신앙과 근대적 사상이 매혹적으로 뒤섞여 있으며, 플랑드르의 민속적 전승의 대지(大地) 위에 서서, 후일 브뤼겔이 계승하는 ‘속담’의 장르를 창시하였다.
그는 생기 있는 자연감정을 그려낸 풍경화가였으며, 그리자유(grisaille)와 브러시를 구사한 탁월한 기법가, 베네치아파(派)를 연상시키는 풍부한 색채가(色彩家)였다. 또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데생(dessin)은 그의 기법의 프로세스와 소묘가로서의 소질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작에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대제단화(大祭壇畵) 《쾌락(快樂)의 동산》 《건초수레》 《동방박사의 경배》, 리스본국립고대미술관에 있는 《성(聖)안토니우스의 유혹)》 등이 있다.

13.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재생'이라는 개념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였다.
서구에서 16세기 초엽은 서구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앞선 시대, 즉 14,5세기의 발견들의 꼬리를 물고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사상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이로 인한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위하여 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잇따르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나라들에서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나왔으며 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던 교황의 힘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서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노선을 가게 된 알프스 북부의 나라들은 르네상스의 양식이 더 늦게 수용된다. 이 지역 대표적 화가로는 뒤러와 홀바인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로 르네상스 예술이 처음으로 태동한 피렌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엇으므로 르네상스로 같이 분류하지는 않는다.
초기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특히 가장 중요한 임무를 떠 맡았던 건축가들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대성당의 건립이었다. 당시 시대를 움직였던 가장 기초 단위의 힘이 종교였으므로 성당 건축은 가장 중요한 미술의 한 영역이었다.
원근법, 소실점,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결합하는데 성공한 전시대의 브루넬리스키, 그 뒤를 이은 알베르티에 이어 16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대성당을 건축하는 브라만테는 고전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흡수, 재현한다.
이들은 거의 제작소로부터 어려서부터 스승의 일을 도우며 기법을 익혔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던 16세기-이들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h (1452 - 1519)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고대 그리이스의 고전 시대와 같은 영광의 시대인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기간이 그가 생존해 있던 때였다. 그는 역사상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만능의 천재였으며 자신이 예술가라는 데 자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 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 기체 역학, 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자연세계를 관찰하는 데 예술가의 눈이 가장 완벽한 기구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에게 자연을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술가만이 가장 휼륭한 과학자이며 예술가가 본 것을 생각하고 그림으로써 나타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베록키오의 제작소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으며 근육과 혈관의 위치등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 적 구도를 연구하였으며 근육과 혈관의 위치등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적 구도를 연구하였으며 이는 그의 소묘와 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휼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등은 이 위대한 대예술가의 손으로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된다.
후원자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고, 모든 방면에 능란한 전천후 예술가로서 다빈치는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비현실적, 관념적인 지적 세계로부터도 자유로워 자신이 본 것을 오랫동안 숙고하여 그림에 옮기기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한 장면을 그리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소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그의 사고 체계가 얼마만큼 풍부한 상상력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대상으로 맞서 치열하게 한 인간 으로서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살다가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의 이해 아래 살다가 삶을 마쳤다 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방박사의 예배>,<최후의 만찬>,<모나리자> 등이 있다. <동방박사의 예배>는 르네상스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기존의 프레스코화가 아닌 그가 새롭게 시도한 유화템페라로 그린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표현이 뛰어나다. 전성기의 과도기적 작품이다. 전시대의 거장 만테냐의 작품과 비교하면 건물과 인간을 대치되게 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구도를 정하고 그다음 보조 역할로서의 건축의 모티브를 정하였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한 식당에 그려진 것인데, 이 그림이 수도원 식당에 걸렸을 때의 반응은 굉장한 것이었다 한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눈을 중심으로 원근법이 사용되었고,뒤로 상징적 건축은 구도의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이 그림의 내용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그는 가장 치밀한 계산아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한 무리의 군상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그림에 대한 확고한 생각은 가장 간결하게 그린 그림으로 나타낸 그의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대한 논의는 끊임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놀라울 정도의 살아있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피렌체의 한 부인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로는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을 이 작품을 유명하도록 만든 것은 스푸마토라는 특이한 채색법의 사용에 있다.스푸마토란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뒤섞여 들어 가는 듯 한 채색법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상상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
다빈치는 이런 신비스런 미소를 눈과 입꼬리에 남겨 놓으므로서 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의 미술이 마침내 도달한 목표였는 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대조적인 사람,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반영해 주는 작품을 남긴 도메리코 키를란다요로부터 3년동안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그로부터 프레스코화의 확고한 테크닉과 소묘의 철저히 기초를 배우고 이 성공한 스승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소장품들을 즉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했다.
그는 이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스승의 비법을 알았으며 인체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연구, 인체 해부학을 탐구하였다. 그도 역시 다빈치처럼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 건축가, 시인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고는 과학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빈치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봤을 때, 미켈란젤로는 인간을 거의 신과 같은 독특한 존재로 보았다. 다빈치가 조용히 사색하는 과학자이자 예술가였다면 그에게 영감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런 영감은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예술가는 신과도 같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고가며 자신의 강한 개성과 끊임없이 싸웠던 그의 가장 뛰어난 역량은 그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그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프레스코화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그려진다. 그 성당은 그 전시대의 유명한 화가들 보티첼리, 그의 스승인 기를란디요 등의 거장들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었는 데 궁형 천장만은 비어 있어 교황이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함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 작업은 근 4년 동안 조수를 쓰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그렸다. 내용은 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인데, 천장 복판에는 창세기와 노아의 이야기를, 창문 사이 벽에는 예언자와 많은 수의 성서 속의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 그 중에서 성서 테마중 가장 뛰어난 부분은 천장의 중앙 부분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이다. 여기서 전시대의 지옷토와 마사치오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전에 볼 수 없던 강렬한 감동이 있다. 최초의 인간아담이 잠에서 깨어난 듯 조물주 신의 손길을 느끼는 모습은 차옺의 순간과 신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 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그가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의 일부분이었던 군상 중 하나인 빈사의 노예와 다윗상, 모세상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회화에서 보다 조각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다. 격렬하고 뒤틀린 듯한 포즈,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듯한 자세등은 아무리 자세가 복잡하더라도 하나의 통일감, 즉 전체적인 윤곽의 뚜렷함 이나 단순하고 안정된 듯한 느낌이 있다. 이는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일 수 있는 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예술의 비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라파엘로 산티 Raffaello Santi (1483 - 1520)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르네상스의 3대 거장 가운데 가장 젊었으며 가장 까다롭지 않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요청대로 로마로 오기 전 다빈치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다른 그의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공간의 깊이를 표현한 정돈되고 우아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서정성과 미켈란젤로의 극적이며 회화적인 풍요한 화풍을 결합한 견고한 미술을 창조했다. 그는 동 시대의 두 대가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는 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순수함와 이상성에 있다 한다. 당시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대로 그도 역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고대 고전시대의 이상미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잃기 쉬운 생명감과 성실성을 확보하므로 자신의 그림을 이상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는 벽화를 그린 벽화가이자 또 초상화가 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성모상의 원형이 된 그란두카의 성모와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 학당, 교황 레오 10세 의 초상, 요정 갈라테아 등이 있다. 주) 스푸마토 : 연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에서 유래. 회화에서 '공중에 사라지는 연기'같이 색깔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부드럽게 옮아가게 하는 수법. 15세기 초 대사들의 특징인 지나치게 또렷하고 거친 윤곽선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하는 능력을 지닌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조르지오네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기법이다.


지오르지오네 Giorgione (1478 - 1510)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 <폭풍우> 경치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됨.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땅,나무,빛,공기,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영격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


티치아노 Tiziano (1477 - 1576)

벨리니, 지오르지오네의 뒤를 잇는 베네치아의 대가.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 이 근대 회화의 중심적 사고 방식이 되기도 했다.

14. 북구의 르네상스

후기고딕 성향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선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전사조와 후기고딕의 만남으로 그 경향은 매우 다양했으며 남부와 다른 북부지방 특유의 성격이 드러난다.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성공과 전파도구로서의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주도 세력국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독일

독일은 뒤러(1471-1528)로부터 말할 수 있겠다.
그 선구적 역할은 숀가우어, 미하엘 파허에 연원하나 이탈리아 여행과 독일의 고딕 성향이 이상적으로 만나 이상적인 북구양식의 인체효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뒤러가 단연 독일의 북구 르네상스인이랄 수 있겠다.
<자화상>, 1500년작, 에서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나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는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권위와 예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사명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판화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한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주요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들이었다.
또, <멜랑꼴리아>, <네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 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외에서 크라나하, 알트도르퍼, 그위네발트 등이 손꼽히는 독일 르네상스 예술가이다. "이겐하임 제단화", 그뤼네발트, 당시의 최대의 판화가로서 목판화와 동판화를 통해 16세기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 끼침. 그의 작품 <수태고지>, <성모자를 위한 천사의 합주>, <부활>등은 모두 고통과 비탄에 빠져있는 인물들을 묘사하였고,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중세적인 <그리스도의 책형>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동감으로 차있고, 원근법에 대한 지식이 적용되어 있어 르네상스적인 성향이 보인다.
"아담과 이브" 고딕미술의 세밀한 자연의 모방에 대한 관심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한 신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지에서 남유럽의 이상을 북유럽에 이식시키려 하였다.
"병사와 죽음과 악마", 이탈리아 미술이 부여했던 조각처럼 균형잡힌 형태와 미적인 인물(기사)와 성도를 향해 신앙의 길을 후기고딕적 묘사, 꿋꿋이 나아가는 미덕을 함축하는 상징이 결합되어 독일 특유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뤼네 발트(Matthis Grunnewald)

세익스피어 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인 그뤼네발트는 후기 고딕양식의 원근법을 구사하여 완강하고 단단한 인물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는 중세 미술의 목적인 설교를 위한 그림을 지향하는 데, 그런 그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걸작 <아이젠 하임 제단화>는 대단히 중세적이면서 초인적인 스타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인의 책형"과 그 패널 안쪽의 ,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율동감의 "수태고지","합주하는 천사","성모자","부활"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 인물상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그뤼네발트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에 의도적으로 되돌아 간 것이 분명하다.


뒤러 (Albrecht Durer : 1471~1528)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만테냐의 판화에서 배운 것이고, 자화상등의 얼굴도 완벽한 균형의 이론에 의해서 구성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하기도 하였다. 뒤러는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뒤러의 <네사도>는 독일 회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67~1543)

한스 홀바인은 영국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는 데, 그는 북부 유럽의 세부표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성과 견실성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초상화를 그렸다. <헨리8세>는 의상이나 보석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물의 성격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 1480~1538)

그는 산속을 헤메며 자연을 연구하였으며 그가 남긴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인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작가가 느끼는 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었다고 말하거나 대표적인 작가를 내세우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네덜란드 풍경화, 플아드르 회화가 탄생하는데 전조를 마련한다. 즉 1500-1600년대에 이르러 풍속화, 정물화등이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인 얀 반 아이크 형제, 플레말레의 화가에서 비롯하였으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는 브뤼겔에 이르러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 서 실제 풍경을 스케치하고 이용하는 사생적인 면에서는 <사냥꾼들의 귀환>에서 전형적인 풍경의 경치를 볼 수 있다. <농부의 결혼식>에서는 소박하고 거칠은 농민들의 모습을 최소한의 모델링으로 간결한 색처리로 명료하게 하고 있다. 구도에 있어서도 철저히 계획된 일관있는 연출을 하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의 성경구를 인용하여 여러 가지 풍자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인물은 보슈의 영향을 받고 풍경이 주가되는 과감한 공간구성의 풍경화에서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민들의 취향에 호응하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비롯하여 세속적인 모든 테마, 즉, 풍경화, 정물화가 1500년대에서 1600년대 사이에 그 윤곽을 드러낸다.

프랑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왕실주도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특히 1494년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한 샤를르 8세 는 새로운 성을 건축하는데 이태리 양식을 활용하고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체리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편 퐁텐블로파라는 일련의 작가 미상의 예술가들이 이태리 마니에리즘을 수용하여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을 낳았고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그 내용은 고대 신화와 우의를 다루며 관능적이고 기교적인 나부나 화려한 귀족들의 모습을그렸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15. 마니에리즘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 그 기교적인 면에서 오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개인의 주관적 성향의 극대화 결과 전성기 르네상스와 다른 경향을 의도하고 자연과 고대형식의 주관적 이상화를 지닌 내적 통찰력 이 재평가 받고 있다.
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고나점에서 자연미(이상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콘트랍포스터의 극단적인 바른 포즈와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단축법과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이다.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인물묘사에서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은 그 이전의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면 단번에 확인되는데 강한 불빛의 명암대비, 동세가 격한 인물들의 움직임고 불안정한 사선구도등이 마이에리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 그레코와 코렛지오는 종교화를 그렸다. 특히 엘 그레코는 톤이 밝고 대담한 붓질과 신비스러운 종교화를 이루고, 반면 코렛지오는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인체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그는 신화를 다른 내용에서도 환성적인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16. 바로크 미술

1600년부터 1750년 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18세기의 비평가들은 마니에리즘과 마찬가지로 바로크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마니에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으며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같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경향이었던 것이다.
궁정적, 카톨릭 적 바로크와 시민적, 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는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는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과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에 있어 내적 외적으로 다르게 묘사된다.
전자가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 고전주의적 " 양식으로 나뉜다. 바로크의 개념은 처음부터 고전주의적 흐름을 타고 있었고 이와 함께 카톨릭 국가들에서 자연주의적 조류가 있었다.
카라바조에 의해 대표되고 이는 후에 바로크 예술의 전반적인 예술 흐름이 된다.

즉, 바로크는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가 있었고,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고딕 이후로 예술양식은 점점 더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갔다. 이런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들은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바로크를 기점으로 이런 분류방식은 의미를 잃게 된다. 즉 예술에 있어서 통일적 성격을 엄격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며 고전적일 수 있었고 분석적이며 통일적일 수 있게 되었다.

미술가들이 대행했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은 갈릴레오나 뉴우턴 같은 과학자들이 대신하게 되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는 해외에 식민지를 앞다투어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에 뒤졌다.
반종교 개혁운동으로 카톨릭의 권위를 되찾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누리며 새로운 형태의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 수가 증가하고 절대주의의 승리는 궁전의 건축을 재촉하였다.
고전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모여든 수많은 미술가, 건축가 등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문화를 창출하고 교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라바조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전시대의 예술을 이끌었던 전통을 거부한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였던 카라바조는 1573년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에서 출생했다.
11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성인이 된 후 그가 태어난 지명이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이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라 부른다.
그의 자연주의적 회화관은 당시 반종교개혁 운동에 부수되어 가톨릭의 새로운 신앙과 맞물렸다. 더 이상 종교는 신비적인 것이 아닌 직감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는 모든 인습적인 것을 버리고 미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카랏치 Annibale Carracci(1560 ~ 1609)

베네치아 학파 특히 코레지오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평소 라파엘로의 그림에 매료되었던 그는 그의 화풍 즉 단순성과 미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빛과 우리 감정에 호소하는 그의 그림 양식은 과히 바로크적이라 할 수 있는 데 그도 카라밧지오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자연에 가까워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카라밧지오보다 신중한 개혁자였다.


베르니니 Lorenzo Bernini (1598 ~ 1680)

카라바조 작고 이후 등장한 17세기 최고의 조각가이며 건축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무시 되었던 육체와 정신이 그의 조각에서는 다른 견해로 부활한다.
즉 좀 더 힘이 주변의 공간에 확산된다. <다윗> 조각상이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이는 회화가 그때까지 수행해 왔던 일을 조각또한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바로크에 와서야 회화와 조각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없어진다. 그는 회화, 조각, 건축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일에 성공한다. 바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이 태동한 것이다.


루벤스 Rubens, Peter Paul (1577.6.28~1640.5.30)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플랑드르의 화가. 독일 베스트팔렌의 지겐 출생.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지겐으로 피해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인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3년 뒤 14세에 랄랭 백작부인의 시동이 되어 귀족사회의 습속을 익혔고, 화가가 될 뜻을 세웠다.
15세 때 A.노르트(1562∼1641), O.베니우스(1556∼1629) 등에게 그림을 배운 뒤 21세 때인 1598년 당당히 안트베르펜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23세 때인 1600년에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8년 동안 베네치아·로마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인 M.카라바조와 카라치파(派)의 영향을 받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차차 명성을 얻는 한편, 만토바공(公)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에스파냐로 여행하였다.
160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고향에 왔을 때 이미 어머니가 운명한 뒤였으나, 그는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로서 고향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 집안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 뒤로는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루벤스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역사화·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제재를 작품화하였는데, 파리의 뤽상부르궁전의 21면으로 이루어진 연작 대벽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루벤스 예술의 모든 특질을 담고 있으며 바로크회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현란한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원만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26년 아내 이사벨라가 죽은 후, 30년 16세의 엘레나 푸르망과 재혼하였다. 1640년 팔의 통풍이 심장에까지 번져 안트베르펜에서 죽었다.


벨라스케스 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6.6~1660.8.6)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에스파냐의 화가. 세비야 출생.
처음 에레라에게 사사하고, 이어 마니에리스트 화가 파체코에게 사사하였다.
정신적으로도 이 문화도시와 스승 파체고의 영향을 받았으며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초기의 작풍은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1622년 수도 마드리드로 나가, 이듬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명암법에 의한 마지막 걸작은 《주정뱅이들─바커스의 대관(戴冠)》(1629)이고, 28년의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중기(中期)는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왕족·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들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본질적인 비극성까지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초상화의 대표작으로는 《왕녀 마리아 안나》 《왕녀 마르가리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50) 등이 있으며 또 큰 구도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성의 항복》(37)이 유명하다.
그 후 두 번째 이탈리아에 체류(49∼51)하는 동안 장기간 연찬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만년의 대작 《궁녀들(라스 메니나스)》과 《직녀(織女)들》(57)은 평생의 화업(畵業)을 집약한 것들이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선에 의한 윤곽과 조소적(彫塑的)인 양감(量感)이라는 기법이, 투명한 색채의 터치로 분해되어, 공기의 두께에 의한 원근법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전동(顫動)하는 빛의 파도에 씻기고, 완전히 대기를 파악하는 벨라스케스의 공간과 기법은 시대를 크게 앞질러 인상파의 출현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의 종교화·신화화는 모두 주제의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조형성 탐구라는 근대성을 지녔으며, 백색·흑색·회색의 해조(諧調)된 색채가 비속화나 이상화에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리얼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에스파냐 화단에서는 개성이 출중한 화가로서 평가되었다.

프랑스의 바로크 : 베르사이유 시대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강력한 국가였다.
그 결과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골동 취미적, 귀족적, 영웅적인 내용이 강조되고 그 밖의 양식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 후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화가들은 조르즈 드 라 투르와 우이 르 냉 등이다. 이들 그림의 공통점은 카라바조가 호평받았던 그 자연주의 즉 강렬한 종교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푸생 Poussin, Nicolas (1594~1665.11.19)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의 레장드리 출생.
처음에 고향에서 Q.바랭에게 배우다가 1612년 파리로 나가 F.엘 및 G.랄르망에게 사사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까지의 일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21년 뤽상부르궁(宮)의 장식에 필립 드 샹파뉴와 함께 고용되었다. 이 때 왕궁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원래 이탈리아 고전(古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더욱 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24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도메니키노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그가 지니는 명쾌단정(明快端正)한 구도와 약간 차가운 듯한 색조는 이 시기의 수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라파엘로 등 고대에 심취하였고, 로마와 상상적인 고대풍경(古代風景) 속에서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하였다. 28년 성베드로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명성이 높아져, 39년 마침내 고국 프랑스의 루이13세로부터 수석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화가들과 잘 맞지 않아, 42년 다시 로마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신화(神話)와 고대사(古代史), 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그것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독특한 이상적인 풍경 속에 그렸는데, 그 장대하고 세련되고 정연한 화면구성과 화면의 정취는 그 후 프랑스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예루살렘의 파괴》(빈미술사미술관) 《아폴로와 다프네》(뮌헨미술관) 《바커스제(祭)》 《플로라의 승리》 《아르카디아의 목자(牧者)》(이상 루브르미술관) 《양치기들의 경배》 《계단 위의 성가족》 등이 있다.

17.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17세기 유럽전역에서는 바로크의 궁정풍 문화가 유행했으나 네덜란드에서만은 시민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술이 전개되었다. 도시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홀란드 북부의 자유도시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국가의 부는 국가나 왕정에게 돌아가지 않고 시민계급이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난 네덜란드에서는 그 주제에 있어서 성화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소재들의 묘사,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 건축화 등이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스케일 역시 궁정이나 교회가 아닌 개인의 일상생활의 용도에 맞는 조그만 규모였다. 따라서 조형예술 중에서도 가장 겸손한 예술인 회화, 또 그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형식인 내실 장식용의 소형그림이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할스 Hals, Frans (1581?~1666.9.1)

네덜란드의 화가. 안베르스 출생.
1591년경 하를렘으로 옮겨 카레르 판 만델에게 사사하고 1616년경 최초의 작품 《성(聖)조르조시(市)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그려 초상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대담한 필치로 모델의 감정과 심리를 교묘하게 묘사함으로써 초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40년경부터 작풍이 변하여 색채가 어둡고 표현이 억제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렘브란트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만년은 불우하여 양로원에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 《웃고 있는 기사》 《니콜라스 하셀라르》 《팔장을 끼고 있는 사람》 《집시여인》 등이 있다. 하를렘에는 국립의 ‘프란스 할스미술관’(1913 개관)이 있어 그의 주요작품을 비롯하여 플랑드르·네덜란드파 전반에 걸친 작품이 수집·전시되어 있다.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네덜란드의 화가. 레이덴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레이덴대학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덴의 화가인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 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42년의 명작 《야경(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의 주문에 의한 단체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이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음으로써 인기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차차 고통스럽게 되었으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사스키아의 유아(遺兒) 티투스의 성장과, 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키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사스키아와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62년에는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에칭·소묘로, 종교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풍속화·정물화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중년 이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으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는 그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 있어서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네덜란드의 시정생활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은 한없는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약 100점)을 그린 사람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가 설혹 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에칭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에칭의 모든 기술은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엠마오의 그리스도:Christ at Emmaus》(1628) 《야곱의 축복》 《유대인의 신부(新婦)》(유화) 《세 그루의 나무》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3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에칭) 등이 있다.


로이스달 Ruysdael, Jacob van (1628?~1682.3.14)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네덜란드의 풍경화가. 하를렘 출생.
풍경화가로 유명한 로이스달가(家)의 일원으로, 아버지 이사크와 삼촌 살로몬(1600?∼70)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648년 하를렘의 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57년경부터 암스테르담에서 화가로 제작에 몰두하는 한편 의사로도 활약하였다.
작풍(作風)은 50년대 중간쯤부터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하늘·물·대지가 일체를 이룬 네덜란드의 독특한 것으로 고사(枯死)한 거목(巨木), 폐허·묘지나, 산의 성채 등을 배치한 우울하고 극적인 것이었다.
화가의 개인적 감정을 풍경화에 반영시킨 최초의 화가로, 이것은 근대 로맨티시즘을 낳은 근원적인 세계였다.
예를 들면, 대표작 《유대인의 묘지:Jewish Cemetery》(60)는 황량한 계곡 위에 떠 있는 번개구름, 중세의 폐허와 고대의 묘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침울한 기분을 자아낸다. 이것은 단순한 서정적 표현을 초월한 것으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지상적 사물의 덧없음을 암시하면서, 배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어떤 풍경화보다 뛰어나다.
주요 작품으로는 《하를렘의 전망》(60) 《풍차:Windmill at Wijk bij Duurstede》(65) 등이 있다.


얀 스테엔 (Jan Steen, 1626 ~ 1679)

브뤼겔에 이어 중세기 세밀화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유쾌하고 소박하게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완성 작품 : <세례잔치>,<니콜라스제의 전날밤>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 (Jan vermeer van Delft, 1623 ~ 1675)

유머러스한 도해적 설명이 있는 풍속화가 아닌, 오히려 인간이 들어 있는 정물화라고도 할 만한 시간이 없는 세계의 표현. 질감, 색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등, 부드러움과 정확성의 불가사의 하고 독특한 조화로 걸작이 됨.

18. 로코코 미술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상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코코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코코는 사실 돈 많고 권태로와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애로틱한 예술이다.
이 시기에는 여성미의 이상 자체가 달라져서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정교한 것으로 되었다. 또한 로코코는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이다. 반면 같은 시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파리의 로코코 양식과는 대조적인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와토 ( Antoine Watteau 1684 ~ 1721)

18세기 초 화가들의 우상 숭배 인물은 빛, 색채, 움직임, 환희 등 아카데미가 싫어했던 모든 것을 갖춘 루벤스였다. 흐르는 듯한 필법과 화려한 색채대비등을 루벤스에게서 물려받은 와토의 그림은 반아카데미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카데미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와토의 그림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페트 갈랑트, 즉 우아한 축제라느 새로운 범주가 와토에 의해 창안되었는 데, 이것은 공원풍의 배경에서 희극 배우와 재미있게 노는 젊은 귀족들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공원의 연회> 은 아름다움의 환성속에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와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는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샤르댕 (Jean-Baptiste Siemon Chardin 1699 ~ 1779)

18세기 귀족풍의 몽상적 세계가 퇴조하고 보통사람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한 샤르댕은 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평범한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공간 질서에 대한 명쾌한 감각을 보여주는 샤르댕은 풍속화가인 동시에 정물화가였다. <주방정물>에서 보듯이 그가 그린 대상은 꾸밈없는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를 떠받들고 있다. 그는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느껴 화폭에 담았으며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과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을 하였다.


호가드 (William Hogath 1697 ~ 1764)

윌리엄 호가드는 뛰어난 초상화가였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생활의 장면에 있었다. 그는 청교도적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선의 보상과 악의 대가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하였다. <소란스런 술잔치>은 '방탕아 편력'이라는 그림 시리즈의 3장면이다. 그림을 통해 설교를 하고자 한 것은 호가드의 시대에 이미 대중미술속에 존재하였으나 호가드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것, 인물의 배치 등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게인즈 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 ~ 1788)

영국이 낳은 위대한 초상화가 게인즈보로는 이탈리아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기 보다는 타고난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그린 <로버트 앤드류스 부부>는 영국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시돈즈 부인>는 싸늘한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인즈보로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그의 그림에선 와토와 같은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는 인기는 없었으나 <시골풍경> 풍경화를 그리는 것도 좋아하였다.


레이놀드 경 (Sir Joshua Reynolds 1723 ~ 1792)

18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만족시킨 화가, 레이놀드 경은 게인즈보로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거장을 연구하고 모방하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받아들였으며, 게인즈보로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반다이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 믿었던 레이놀드 경은 지식인이었으며 상류사회의 생활을 했다. 또한 상류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그는 초상화를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을 보면 아이의 성격과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셰 (Francois Boucher)

그는 대단한 화가라기 보다는 예술적 관습의 대표자로서 '징세청 부인'과 '신흥부자들' 및 자유주의적 궁정인사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에로틱한 장르 그림의 대가이다. 그는 와토의 "페트 갈랑트"다음으로 로코코 회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연애신화의 창조자이다. 또한 에로틱한 주제를 공예 미술로 확장하여 국민적인 양식을 만들었다.


앙투완 (Jean-Antoine Houdon 1741 ~ 1828)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미술가 이자 조각가인 앙투완은 베르니니가 시작한 전통을 이어 받았다.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 <볼테르 상>에선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있는 지성을 엿볼 수 있다.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1732 ~ 1806)

게인즈보로와 같이, 프랑스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측면에 대한 취향을 표현한 작가 프라고나르는 와토의 전통을 따르는 화가였다.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을 보면 놀라운 효과를 구사하는 그의 솜씨를 볼 수 있다.

19. 신고전주의

1. 개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과 그 성격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그 주요 연대로서 전대의 태양왕의 철저한 섭정이후 혼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시기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운과 전대의 화려한 정치 성향의 귀족, 의식이 싹트는 시민계급의 성장의 정치적 위기, 한편 현대를 예고하는 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이 혼재 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과 개개인의 자유, 애국심들이 얽힌 감정의 출구가 필요했다. 예술계에서 신고전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그들의 이상에의 갈망을 행동과 사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미술에 나타난 주조는 신고전주의의 경우 "고전미"가 그 흐름의 주요 성격에 보이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새단장은 고전주의의 복귀로 그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은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로 칭송받으며 1775년 빙켈만의 「그리이스미술 모방론」이란 저서에서 그 이상미가 재평가 받는다.
그 결과 고대에의 관심을 팽배하였고, 고대의 특징 즉, 명석한 판단에 따른 절제되고 철저한 정확성은 혁명정부가 바라던 이상을 적확하게 구현시키기에 알맞았다.
로코코시대가 취한 과도한 사치와 화려는 혁명정부의 첫 번째 숙청과제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되 명확하고 강직한 선, 균형과 조화, 안정과 형식미의 존중은 고전주의를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취한 특징이다.
오히려 더 완강하고 절제된 선과 색으로 더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크 시대의 연장선 상에서 Poussain적인 회화의 계승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주제에 드러나 확실한 정치적 의지에 근거한 의도적인 소재, 더 철저하고 절제된 선묘는 더욱 심화된 고전미를 나타낸다.
한편 공간의 압축화, 실제 사건의 주제화 등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마지막 고전주의자인앵그르에 드러나는 동방취미, 왜곡된 표현은 시대에 부합하는 취미 변화의 반영이자 '낭만정신'이 깔린 기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써 새로운 미의식의 예고라 할 수 있겠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브루터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고대에서 빌어온 주제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표현된 공간은 고대의 확장된 공간미를 넘어선 오히려 압축된 공간의 사용으로 연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고전미와 더불어 현대적인 요소로의 전환이 드러나고 있다.
또 '마라의 죽음' 등에서 나타난 실제 사건의 주제화는 은유와 비유를 통한 고대 신화를 한층 더 대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그 죽음의 비장미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그 죽음을 영욱적이고 숙엄한 주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비롯된 주제만큼은 엄격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의 수용'(로잘린 크라우스)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룩상부르 공원'은 그가 수감생활 중에 그린 유일한 풍경화로 정치가 내제한 그 이전의 회화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즉 있는 실재의 공원의 모습은 안정적인 자연의 일면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고전적인 안정감과 덧붙임 없는 재현은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새로운 이상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제국이 망하고 추방되어서도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로 이어서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앙트완느 장 그로(1771~1835)는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에서 낭만적인 모습에 신비감과 영웅의 모습을 동시에 그려 천재성을 인정받으나 그의 감정적인 낭만 기질은 끝내 두 사조간의 갈등을 자살로 마무리한다.


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David가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는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David가 갖고 있던 정치성을 지우고 펄저한 미의 구현에 매진한다.
그는 바로크 선상에서 이어진 푸생적인 미의 계승자로서 루벤스 정신의 계승인 낭만주의에 맞선 마지막 고전주의자가 된다. 그는 소묘가 채색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여 정확한 사생의 훈련을 부르짖었다. 즉 즉흥과 무질서를 경멸하도록 가르치며 실제로 그의 작품은 대체로 채색사용에 인색하다.
<오달리스크>는 그가 자주 그린 소재이다. 그의 재능은 "물리적인 정확성과 심리적인 통찰력"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전미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게 하였고 수많은 여인의 누드에서 그 미학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확한 묘사력을 가진 그가 꾀한 오달리스크의 신체의 왜곡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묘력은 결국 수단이며 근본적인 미, 즉 아름답게 보이는 방식에 관심이 여인의 누드에 집중 되었을 때 관능미를 주목하고 그것의 부각은 왜곡된 신체미로 오히려 더 이상적인 효과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저변에는 이미 이국적인 소재, 오리엔탈리즘의 경향 등을 통한 이상향의 실현이 낭만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도치적인 소재의 이상미 추구는 결국 낭만 정신의 결과인 것이다.

20. 낭만주의

일정한 사조라기보다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전주의의 관습화, 궁정적 귀족적 기교의 수사학에 결별을 고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비역사적, 비변증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역사발전은 그 근원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정법적 과정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동적인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는데 우리와 우리의 문화가 끝없는 흐름 속에 있고 간단없는 투쟁 속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정신적 삶이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에서 도피처를 찾는 그들은 과거를 자신들의 모든 희망과 꿈을 충족시켜 주는 장소로 만들었고 이 도피처로부터 이념과 현실, 자아와 세계, 개인과 사회의 모든 긴장을 추방하였다. 유토피아와 동화, 무의식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과 신비스러운 것에로의 도피, 꿈과 광기에로의 도피, 유년시절과 자연에의 도피는 현실에서의 책임과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심각함을 이어받으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는데 자연을 더 면밀히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와 매일매일의 사건, 감정에 몰입하기도 한다.

고야 (Farancisco de Goya Lucientes 1746 ~ 1828)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독립성을 주장하였으며 초상화나 「카프리쵸스」에칭 시리즈와 같은 새로운 주제의 에칭 등의 작품을 남겼다.
1793년 중병을 앓은 후 귀머거리가 된 그는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칩거하여 그의 상상 속에 모여드는 유령 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전쟁의 참담>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끔찍한 고통과 고문을 보여준다. (거인1808~1812) 스페인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때로 거인은 프랑스 침략에 대항하는 스페인의 저항정신을 표상할지도 모르나 그림 속의 인물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전쟁의 참상을 대하면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자화상) 그를 돌보아 주는 아내의 팔에 안겨 있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어두컴컴한 뒷배경에는 악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다. 그의 병적인 강박관념이 나타난 '블랙페인팅'으로 넓게 칠해진 때로는 붓보다 나이프를 더 많이 사용하여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그려진 작품들은 20C 표현주의의 원시적 비관주의를 예고한다.

1.  영국과 미국의 낭만주의 풍경화

풍경화는 당시 유행하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운동과 장 자크 루소, 그리고 영국 호반시인의 영향 때문이었다.
실제의 전원을 의도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감상하는 경치관광여행의 점진적인 유행은 회화와 판화의 수요를 늘게 했다. 여행과 스케치에 인기 있던 장소는 영국의 '황량한' 지역 산맥과 황무지,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의 폐허들이었다.

컨스터블 Constable, John (1776.6.11~1837.3.31)

영국의 풍경화가. 제분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02년 아카데미전에 입선하였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와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화풍은 자연에 대한 관찰이 섬세하고, 영국 특유의 소박한 풍물을 묘사하였으며 밝은 색채감을 나타냈다.
특히 초록색의 발견자로서 근대 풍경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감각은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프랑스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건초 수레》 《솔즈버리 대성당》 등이 있다.


터너 Turner, Joseph Mallord William (1775.4.23~1851.12.19)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영국의 화가. 런던 출생.
14세 때부터 로열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이듬해 아카데미 연차전(年次展)에 수채화를 출품하였다. 그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 제작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20세 무렵에는 유화를 시작하여 풍경유채화를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R.윌슨을 비롯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 여행에서 익힌 각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24세 때에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고, 3년 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02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풍경화의 소재를 모아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
한편, 이 무렵부터 N.푸생, C.롤랭의 고전주제적 풍경화에 끌려, 특히 구도를 잡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20년 전후부터는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겨, 자연주의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낭만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19년 T.로렌스의 권유에 따라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하게 되었다.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1838) 《수장(水葬):Peace:Burial at Sea》(43) 《비·증기·속력》(44) 《디에프항》 《노럼성과 일출》 등의 대표작은 그의 낭만주의적 완성을 보여준다. J.라스킨의 절찬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주목받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망명해온 그 후의 인상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 독일의 낭만주의

독일 낭만주의는 풍경화, 상징주의, 민족적 중세주의의 세가지 양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시각적 강렬함에서는 영국과 가깝고, 더 엄숙한 성격을 띠고 뚜렷하게 종교적 주제 다루었다.

프리드리히 Friedrich, Caspar David (1774.9.5~1840.5.7)

독일의 화가. 그라이프스발트 출생. 드레스덴에서 죽었다.
처음 코펜하겐에서 배웠으나, 1798년 이래 드레스덴에서 활약하고, 1816년 그곳의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다. 가장 순수하게 독일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풍경적인 제재(題材)에 시종하여, 특히 가을·겨울·새벽·안개·월광 등의 정경을 독특한 정적감(靜寂感) 속에 표현하였다.
작풍은 드레스덴 이외로는 거의 전파되지 않아서 독일화단에서도 잊혀졌으나, 20세기 초 이래 재평가되어 오늘날에는 19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힌다. 작품은 드레스덴·베를린·함부르크 등지의 미술관에 많은데, 거의가 초기·중기의 것으로 만년의 작품은 오히려 러시아 각지에 산재되어 있다.
산중의 십자가》 《북극의 난파선》 등의 작품이 전하며 그의 글도 《고백록 : C.D.F.Bekenntnisse》(1924)으로서 출판되었다.

3. 프랑스 낭만주의

제리코 Gericault, Jean Louis Andre Theodore (1791.9.26~1824.1.26)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루앙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 등이 있으며 약간의 조각작품도 남겼다.


들라크루아 Delacroix, Ferdinand Victor Eugene (1798.4.26~1863.8.13)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출생.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31)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33), 국회 하원도서관(44), 국회 상원도서관(45∼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49∼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27) 《햄릿 석판화집》(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도미에 Daumier, Honore Victorin (1808.2.20~1879.2.11)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32년 국왕 루이 필립을 공격하는 정치풍자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그리고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 《3등열차》 《관극(觀劇)》 《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코로 Corot, Jean-Baptiste-Camille (1796.7.16~1875.2.22)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27년 《나르니다리》로서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는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샤르트르 대성당》 《회상》 등이 유명하며, 풍경화 이외에도 《진주의 여인》 《푸른 옷의 여인》 《샤르모아 부인상》 등이 있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彩調)를 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21. 사실주의

19C 사실주의 개념과 형성과정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 더 나아가 그것의 '완벽한 이상화된 재현'으로서 사실주의 였다.
19C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사실주의 등장 이전의 낭만주의는 그 개념적인 면에서 대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감정'이 중요하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낭만주의 회화는 격정적이며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쫒거나 이국적인 소재등에 깊은 관심을 회화로 표현한다.
표현에 있어서는 색채에 비중을 두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현실을 떠난 상상력을 부추기는 소재는 따라서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취했다.
사실주의는 낭만정신에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한다. 특히 19C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쿠르베, 도미에, 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 작가는 그 현실의 운을 자신의 의지와 가치에 입각해서 결과는 달리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생활하면서도 간과되어온 인간생활과 그 이면의 다소 불미스럽거나 적나라한 현실을 주목하고 표현해낸 회화세계일 것이다.]
즉 사실주의만을 놓고 볼 때 19C이전과 이후의 사실주의는 전자는 다소 기술적이고 이상화된 자연의 재현으로 낭만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때, 후자는 사회참여적이고 소극적인 계몽주의-개혁 하지는 않아도 회화를 통한 적나라한 현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가 배어있는 진상(reality)과 진실(truth)을 갈구한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어서 회화를 수단으로 한 사상의 표현으로 말할 수 있겠다.
낭만주의에 대한 사실주의는 현실을 간과한 어떠한 표현도 부정한다.
사실주의 입장에서 낭만주의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쿠르베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는 공언으로 사실주의의 개념을 대변하며 '상상력'으로 집약되는 낭만주의와는 대조를 보인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의 극적인 대조로 나타난다. 특히 색채에 있어서도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시 표현수단인 현란한 색감을 사실주의는 보이는 대로의 과장없는 색감으로 결과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고 주제표현을 강화해 가장 큰 대조를 보인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소재자체가 대조적인데서 비롯되어서 [사르드나팔르의 죽음] [메탄호의 뗏목]은 내용 자체가 극적이며 등장인물도 격정적인 자세의 불안할 정도의 공간배치가 나타난다.
반면 사실주의는 [돌깨는 사람] [만종]등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정적인 모습과 그들의 현실공간을 재현해서 단순하고 차분한 구성을 나타낸다. 사실주의 배경에는 당시 사회의 의식의 전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Hyppolue Tainne(텐느)과 Conte의 실증주의를 들 수 있다.
텐느의 역사관은 그 지역의 환경과 시대 사회의 관습이 그 시대의 예술가를 대변하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이러한 '당대성'인식에 주목하고 실천한 것이다.(이성주의가 팽배하여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으며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시작) 한편 19C는 과학과 기술의 태동 이성주의의 팽배를 부른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실증주의는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시민정신에 평등사상을 고취하는데 역할하였고 민주사상에 이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이상 고고한 가식적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이 주제로 등장하는데 정신적인 역할을 했다.

쿠르베 Courbet, Gustave (1819.6.10~1877.12.31)

프랑스의 화가.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 콩테의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1849), 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작업실》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센강변의 처녀들》(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66) 《사슴의 은신처》(66) 《샘[泉]》(68) 《광란의 바다》(76) 등이 있다.

22. 인상주의

인상주의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상주의자들이 외적세계에 찾아낸 어떠한 편견,선입관에서 완전히 개방된 순수한 상태에 있는 시각적 진실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의 외계에 대한 충실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충실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것이 빛이다.
빛을 통한 자연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형태도 일정치 않았다.
인상주의자들의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 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야외주의(플레네리즘 혹은 외광주의)를 만든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점묘수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망막적인 효과를 노린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래서 관심을 갖은 것이 시각세계이고 그 시각세계의 민주성은 근본적으로 [시각의 근본적인 혁신] 의 핵심이 된다.
변화한 시각방식을 받쳐줄 색채학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달은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과거의 주제·개념 대신에 모티브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고 그 결과 국수주의적인 과묵한 주제가 아닌 새로운 변화된 세계에 들떠있는 파리의 풍물이 주된 노래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제를 태양광선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변화하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연작형식이 유행한다.
모네가 그린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수련]등의 연작에 있어 작품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은 태양광선을 위한 부차적인 소재인 것이다. 이 그림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윤곽과 형태가 드러난다. 화면의 구성도 삼각형구도나 소실점이 한두개로 축약되는 선원근법적이 아닌 대기원근법을 사용한다. 그 효과는 자칫 어수선해보이나 자연스럽고 우연한 느낌의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화를 환영으로서 인식하기를 그만두고 '평면성'의 회화를 구축하며 Modernity를 획득하고 있다. 시각의 캔버스 자체로서 인식하게 하여 더 이상의 재현적인 효과를 유발하는 허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직관에 의한 뉴앙스 이미지의 연출은 곧 추상회화가 갖는 성격을 내재하는 이와같은 인상주의는 마네로부터 언급되고 있다.
1863년에 발표된 [풀밭위의 점심]은 인상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지 않으나 주제나 조형 및 색채면에 있어서 인상주의와 직결되는 사실주의 새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상식을 벗어난 소재와 아울러 화면구성에 있어서도 각 대상은 일회적인 요소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조형적인 요소로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색면의 조화도 종래의 중간색조와 칙칙한 다갈색조를 배제하고 녹색을 주조로한 전통적인 명암법에 의거하지 않는 선명한 색조로 화면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파리 교외의 들놀이 퐁경에서 想을 얻은 것으로 옷입은 남자에 나체에 여자를 [전원의 합주]에서 본따고, 인물의 포즈와 배치는 라파엘로의 [퍼머스의 심판]에서 본딴 것이다 [올랭피아]는 피렌체에서 묘사한 티치아노의 작품 [우즈비노의 비너스]에서 구도를 빌어온 것으로 사실주의적 순수 회화라고 하는 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한 작품이다 . 그림자에서 빛으로 옮기는 부분을 무시하고 그림자가 없는 피부나 검정 일색의 상의등을 단순히 색면으로 처리한 방법이 당시로서는 기이하다하여 비난을 받았다.
1856년 65년의 살롱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여성의 나신을 이상화시키지 않았고 신화나 우의의 베일로 가리지고 않은 채 제시했기 때문이다. 造形的으로도 피부의 밝은 크림색이 어두운 배경위에 펴낸것처럼 부각되는 효과는 평면적 기법으로 표현한 [풀밭위의 ~]보다 한걸음 앞선다.
19C 프랑스 관전파의 화가들은 과거의 거장들이 명암법을 준수했던 나머지 짙은 갈색을 남용했다.
그러한 가운데 밝은색조를 들라크르와가 사용하고 마네가 뒤이었다.마네는 중간톤을 싫어하고 인체나 물체의 입체성에도 화면의 패턴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대담한 채색법을 도입 [올랭피아] [풀밭~~~~]은 3차원을 2차원 평면으로의 도약이다.
'채색의 경우 빛을 도입할 때 그것과 상관해서 얼마만큼 그늘을 도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무를 타파하고 밝은 색채를 밝은 색채 그것으로써 사용하는 가능성을 개척' 이것은 외광에 대한 색채처리이고 또 움직이는 현대의 처리도 문제 삼고 있다.
재생한다는 의미는 면밀한 대상의 관찰을 풍부한 색채로 종합하고 그 가운데 풍부한 형태가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 대상들은 원추.원통 구형으로 축약되어지며 그의 형태는 세잔느식의 질서로서 새로이 구성된 건축적인 견고함을 갖춘 회화 세계가 된다. 일련의 [대수욕도] [빅트와르 산]이 그러한 종합적인 구축적 자연의 구현인 것이다.대상은 모두가 약간씩 다른 시점에서 면으로 분할된 밝은 색채로 구성되어 순수조형의 의지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말년의 그의 회화는 대상이 하나의 조형요소로서 객관화되어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중성적이고 단순하게 되어 형태요소로서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철저한 대상의 자기화를 거친 객관화는 그것이 재현미를 떠나서 순수회화의 조형미를 위한 형태가 되어 추상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즉 자연의 변화무쌍함의 일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름대로 질서를 부여해 생긴 형태가 극도의 주관적인 감정과 연관이 되면 곧 추상이 되는 것이라 본다.
쇠라와 세잔느의 한계는 자연세계를 주관적 화음과 질서로 통일하려고 한 것은 무질서한 자연세계와는 독립된 새로운 리얼리티의 추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인상주의 화가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세계에 머물렀고 일상적인 주제 역시 사실주의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인상주의자들로 알려진 화가들과의 공식적인 연결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마네는 일찍이 아방가르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가 활동할 당시는 사실주의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때인 만큼 그는 쿠르베가 그의 [작업실]에서 재창조하는 영웅으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과시했다면, 마네는 물감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사실주의로부터 그는 당대의 삶으로부터 채택해 그것을 실물 크기로 그린다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 방법을 전통적인 도상학적 주제(iconograpic theme)에 대담하게 접합시키기 도 했고 때로는 옛거장들 특히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거장들의 양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현대 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1863년의 [낙선전]은 마네는 물론 휘슬러,피사로,세잔느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낙선전에 마네는 [풀밭위의 식사]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똑바로 앞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시선은 보는이를 화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린 방법 역시 색조의 조정에 의해 명암효과를 추구하는 전통방식을 버리고 면면이 강조되고 단일 색채로 크게 처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 실제로 여과되지 않은 대낮의 광선과 세부 묘사의 단순화, 뚜렷한 실루엣, 빛나는 색채의 효과를 포착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같은해에 제작된 [올랭피아]는 역시 고전주의적 주제에서 누드를 차용하고 있는데 티치아노 이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고야의 [누드의 마야]에 이르기 까지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누드의 여체로서의 관능성, 신비로운 신화적 일면을 배제하고 창녀임을 알수 있는 도상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신있으며 저돌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재현양식은 중간색조는 사용하지 않은 단순화된 색채가 어둡고 밝게 대조되어 단조로운 색채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했다. 마네의 의의는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제 회화이 문제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


모네 (claude Monet 1840 ~ 1926)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모네는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앞에서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화면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마무리였다.
또한 비평가들이 격분한 이유는 그림의 기법 뿐만이 아니라 화가들이 선택한 소재에도 있었다.
그림같은 화면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그린 모네는 일상의 광경이 지니는 진정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강'은 그림속의 대상물들이 모두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고, 형태는 낱낱이 해체되어 색채의 빛으로 환원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검정색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늘 부분에도 색채가 넘쳐 흐른다.


르누아르 Renoir, Auguste (1841.2.25~1919.12.3)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J.A.와토나 B.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 겨우 부채그림이나 점포장식 등을 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C.모네, A.시슬레, 바지위 등을 알게 되고 또 C.피사로, P.세잔, J.B.A.기요맹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크루베 등의 영향을 받았고,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후에는 작풍도 점차 밝아졌다. 그리하여 인상파의 기치를 든 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1874)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대작(大作)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1876)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79)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그의 화풍도 마침내 한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귀국 후 얼마 동안의 작품은 색감과 묘법(描法)이 크게 바뀌었다. 즉 담백한 색조로써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서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로 《목욕하는 여인들》(1884~87) 등을 그렸다. 그 후는 완전히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90년대부터는 꽃·어린이·여성상, 특히 《나부(裸婦)》(88) 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최후 10년 간은 조수를 써서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母子)》(16)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드가 Degas, Edgar (1834.7.19~1917.9.17)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74년부터 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23. 후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뚜렷한 시각화가 이루어진 것은 1886년 제 8회 마지막 인상주의전을 들 수 있다.
기존 인상파 화가는 드가와 피사로 뿐이고 르동, 고갱, 쇠라등의 새로운 작가들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의 의미는 1880년대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인상파화가들도 인상주의의 순수한 광학적 감각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란 명칭은 Roper Fry가 기획한 전시회에서 비롯하여 인상주의의 색채에 영향을 받은 계승이자 단지 시각효과를 넘어서 작가적 색채가 주관에서 비롯되는 각기 특징적인 주의로서 극복의 뜻을 담는다고 하겠다.
후기 인상주의자들은 소위 신인상주의를 포함하여 쇠라, 고호, 고갱, 세잔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이다.
화가의 눈에 의한 직접 목격된 모든 사실이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자연의 탐구와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이 인상주의의 목적이었다.
인상주의에서 빛속에 그림의 윤곽선이 소멸되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간과했던 푸생의 고전주의와 단순성, 균형, 질서, 필연적인 감각을 되살리는 데 공헌한 일련의 화가들에게 붙인 개념이다.
1910 ~ 1911년 영국의 런던에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전시회에서 유래했다. 낭만주의처럼 하나의 운동이나 경향을 지칭하지 않으며 피사로, 모네, 시슬리 등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구성과 표현 내용을 중요시 했던 경향을 말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해서 화면의 균형과 질서, 형태 등을 분해 했다면 이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를 복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회화의 장을 개척했다는데 그 공로가 있다 하겠다.
자연을 대했을 때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인상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인상주의자들이 상실했던 깊이와 불분명한 물체의 형태 즉 입체감등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이들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색면의 구성과 색채, 균형감, 표현에서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발전하여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세잔 Cezanne, Paul (1839.1.19~1906.10.22)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61년 그만두고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여기에서 C.피사로, A.기요맹 등을 알게 되고,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72년 퐁투아즈에서 헤어졌던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하고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단지 반관전(反官展)이라는 입장에서 동조하는 정도였으며,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96년 인상파그룹과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는 작품에만 몰두하였으며 4년 후인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 《생트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고호 (Van Gogh 1853-1890)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세잔느와 쇠라가 인상주의 약식을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고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화필을 이끌어 갔다.
인상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 점이 그의 주요관심사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자연을 재구성하지 않고 사물의 전형적인 성질을 부각했으며 사물이 가진 독특한 면을 드러내려 했다. 화면의 모든 형태는 고호 바로 자신처럼 느껴지도록 개성적인 화필과 색면으로 균형감과 움직임을 강조했다.
특히 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은 그의 그림의 특색으로 고호 자신의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명의 모든 형태를 통합하여 표현하려 했던 그의 강한 종교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형태왜곡은 추상을 예고하여 병적 심리 내면적 드라마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20세기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목탄을 사용하는 드로잉이나 어두운 색의 유화가 대부분이며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기독교의 도덕성과 복합시키는 주제를 사용했다.

2. 1886 파리 밝은 광선, 색채로 덮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판화와 베르나르의 영향으로 색채를 평면으로 강렬하게 구사하며 윤곽선을 강조한다.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대상은 야외의 풍경이나 눈앞에 보이는 것 들이지만 주제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들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느끼는 주관적 감정 세계와 작가의 직접적 통화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4. 1889 생레미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처리로 표현주의 성격을 강조한다. 50*100cm 크기의 수평적 캔버스가 많으며 아를르 시기의 원색 사용보다 초록색, 파랑, 검은색 사용이 특징이다. 개인적이며 어느 그림에서나 화가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다. 37점의 자화상이 남겨졌다.


고갱 (Gauguin 1848-1903)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폴 고갱은 뒤늦게 입문하여 면치 못하다가 생을 비극적인 화가이다.
그가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는 피사로의 영향이 컸다.
개인적으로 그는 인상주의풍의 작품을 상당히 보유했었으므로 그 출발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미학적인 한계 즉 지나친 자연의 관찰 특히 광선을 쫓아간 분방한 색채가 "사고의 깊고 신비스러운 곳"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상주의와 다른 점이 드러난다.
그는 "단순한 색채를 강렬하게" 보여주면서 인상주의를 벗어난다.
그는 퐁와벤으로 경제적인 이유로 옮기고 거기서 베르나르라는 작가의 굵은 윤곽선의 새로운 양식을 보게된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비슷하게 분할된 면이 굵은 선으로 테두리 되어 클로와조니즘이라고 불렀는데 대담한 평면의 색면과 강한선은 고갱의 관심을 끌었다. 그 결실이 [설교후의 환상] (1888) 이다. 이 그림은 이와 같은 굵은 윤곽선으로 면면히 분할된 평면적인 공간이외에 고갱 예술의 실마리가 되는 상상, 신비, 사상이 나타난다. 그는 중간의 나무로 경계지어 붉은 색의 바탕이 상상세계를 중심으로 현실과 기도후의 환영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습관적인 재현세계를 떠나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와 사실적 세계의 공존이 한데 어울어지고 있다.
이후 고갱은 보이는 세계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점점 더 선과 색채의 추상점을 통한 신비스러운 내면세계를 표현하게 된다. 고갱의 조형세계를 특이한 취미를 반영하여 새로움을 추구한다.
인상주의로부터 비롯된 일본판화에서의 모티브와 평면적인 색채, 판화 자체의 흥미를 얻었고, 타히티 섬이나 그 이전의 어린 시절의 외국생활에서 비롯된 원시, 토속문화에의 관심으로 그가 주장한 관념의 조형화를 강렬한 형태와 색채의 종합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다분히 서구 문명의 우월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문화를 응용할 뿐 그 문화자체의 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제국주의적인 정치적 전략과 더불어 비롯되었다고 해도 원시미술에의 관심을 환기하고 이 후에 영향관계의 기원으로 보는데는 큰 의의가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의 세계를 확실히 믿었으며 그러한 신념은 [자화상]의 성격화된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새롭게 목판이 가진 참신함, 질박하고 투박한 각선으로 비롯된 겸손한 선과 형탤르 주목하여 인간의 본능적 감정이 표출된 듯한 이 파격적인 목판은 유럽의 전통적 구성에서 대담하게 벗어났을뿐 아니라 주제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고갱은 문학의 상징주의 작가들과 공통점을 갖게 되는데 모두 미지의 세계의 속삭임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면에 깊숙히 감추어진 인간 사고의 빗물질적이고 반자연적인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상징주의 회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말년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그의 사상의 집결체로서 오른쪽의 유년기 성숙기로 진행된다. 습작과정이 거의 없이 직접 캔버스위에 작업한 이 그림은 황금색과 푸른색으로 채색된 시간이 정지된 신비스런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갱의 작품들은 내면의 심리보다 자연자체를 주관적 시각으로 표현했으며 재현적 색채를 벗어나 상징적 색채를 사용하여 색자체의 자율성과 힘을 강조하였다. 마티스등 야수파에게 색의 힘은 영향을 끼쳤고 조형성보다는 감각, 상징적 내용에 치중하여 종합주의를 나타낸다.

1. 초기 (파리) 풍경화 주종 인상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2. 1888 클로와조니즘을 수용하여 과감한 탈바꿈을 시도 했으며 일본 판화에 심취했다. 습관적으로 그려왔던 재현적 세계에서 떠나 보이는 세계보다 작가의 상상력의 우월함을 표현하였다. 선과 색채의 추상성을 통한 신비스러운 내면세계 표현에 집중하였다. 신비스럽고 복잡한 관념의 세계를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와 색채의 종합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 종합주의 : 원시미 술이나 민속예술의 독자성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3. 1891- 타히티 보다 근원적인 원시적 감성을 찾기위해 타히티로 떠나 타히티의 사람들의 넓적한 몸과 갈색피부, 토속신상이 등장하고 마돈나. 이브 같은 서구의 전통예술이 주제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그렸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표현을 많이 했으며 태피스트리 같이 표면을 장식적으로 엮어주는 색채표현을 하였다. 미신과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타히티 여인들의 표현에서 여성보다 자신이 합리적이고 우월하다는 유럽남성중심의 사고를 보인다고 지적 받기도 한다. *순수한 색채의 가능성과 표면의 장식성에서 새로운 미술의 방향을 이해했고 20C 미술의 모체가 되었다.


쇠라 Seurat, Georges Pierre (1859.12.2~1891.3.29)

신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Une Baignade, Asni뢳es》(1883∼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Les Poseuses》(88) 《기묘한 춤 Le Chahut》(89∼90) 《화장하는 여인》(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뚤르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 1901)

파리 몽마르트의 유명한 나이트 크럽인 물랭루즈를 그린 로트렉은 이 그림에서 대조적인 명암법, 전경과 후경의 도발적인 구성, 인물의 포즈, 소묘와 유채를 섞은 화법으로 드가의 인상주의 회화와 공통점을 가지고 잇다. 그는 상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인상주의자의 카페 장면이사의 것을 느끼게 한다.


루소 Rousseau, Henri (1844.5.21~1910.9.2)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마이엔현(縣)의 라발 출생.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4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가사 제대하여 파리에 정주하였다.
파리 세관에 세관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전기에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은데, 선량한 일요화가로 알려져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된 듯하다.
85년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展)에 거의 매년,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세관에는 1893년까지 24년간 2등서기로 근무한 듯하나, 퇴직 후에는 파리 변두리에서 바이올린·그림 등의 교수를 생업으로 삼으며 그림제작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1891년경부터 이국적인 정서를 주제로 다룬 《경악(驚愕:숲속의 폭풍)》(1891) 《잠자는 집시》(97) 《뱀을 부리는 여인》(1907) 《시인의 영감》(09) 등 창의에 넘치는 풍경화·인물화를 그렸다. 이들 작품에는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엿볼 수 있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

24. 상징주의

1880년대의 파리의 예술동향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이었다.
상징주의는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구조적 갈등 속에서 탄생했으며 이는 서구 문화가 르네상스 이후 지향해온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실감에서 나온 태도였다.
상징주의의 뿌리는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탐구했고 이성중심의 예술에서 탈피하여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직관적인 느낌을 풍부한 색채와 보다 충동적이고 자유스러운 데생으로 표현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인 관념과 과학에서의 맹신에서 비롯된 기계적이 된 일상을 대신하여 감정과 욕망의 표현 감각과 꿈과 신화의 시각적 표현이 목적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미학적 한계점인 일상적이고 표피적인 모습의 단순한 시각화는 신화와 몽상의 주제로 바뀌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인상주의에서 결여된 인간의 조건과 정신적 세계를 보여주는 미술은 부활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상징주의 문학이 먼저 대두되는데 보들레르는 correspondence의 소네트에서 향기, 소리, 색채는 감각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전달한다고 했다.
보들레르는 미술은 눈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이 있는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상상력에 의해 표현된 미술은 본질적인 내적 실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 뒤를 이은 상징주의 문인들은 대중적 물질주의에 혐오를 느끼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사회의 관습적 질서는 예술을 파괴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묘사보다는 감정의 강렬함을 묘사하는 단어로 선택했듯이 화가들 역시 자연을 모방 해야하는 부담에서 자유롭게 되어 색채와 선 , 형태로 보다 광범의한 미적 감각을 시사할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 이집트, 원시미술, 중세, 근동, 그리고 민족미술의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 보다는 직관과 감정에 의론해서 감각의 해방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감정과 내재된 관념을 찾으려 했다.
점차 비물질적 세계를 동경하고 개인적인 충동과 경험을 중시하여 도덕성을 개의치 않고 더 내성적이고 탐미적으로 혹은 데카당 하게 되었다.
고갱이 상징주의의 리더로 떠오른 이유는 회화의 독자적인 언어인 형태와 선, 색채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고 그런 점에서 그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상징주의의 기수가 된 것이다.
초기의 상징주의 화가들은 독자적인 회화를 찾지못하고 전통적인 상징의 형태와 문학적 또는 신화적 주제를 탐구했다. 귀스타프 모로, 퓌비드 샤반느, 오딜롱 르동이 주요 상징주의 화가들이며 이들은 주제에서는 변화를 추구하나 형태, 색채등에서는 아직 전통적인 고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형상에 치중했으나 아카데미즘의 진부함에 빠지지 않과 신화나 원형 내면의 세계를 강렬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나타내려 했다. 이들은 특히 Fomme Fatale의 이미지를 담은 여성을 표현하여 다소 시대적인 남성중심사관을 나타냈다. 모로의 [살로메]등이 대표적인데 여성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권리가 강해지는데 대한 거부감이자 나약한 남성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모로는 이외에선 상징주의 작가들의 전형이 될만한 작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양식을 샤세리오로부터 전수 받았다.
그러나 문학 철학 고고학 신지학등의 관심에서 비롯된 전부는 그의 회화에서 정교하고 이국적인 신비의 분위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올페우스]는 그의 첫 살롱 출품작으로서 고전의 전형에도 분위기가 주는 죽음, 고통은 상징주의를 대신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상징주의 작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퓌비드 샤반느는 일상사에서 벗어난 비현실적이고 이상화된 고대의 옛 문명을 상기시키며 따라서 아카데미시즘의 틀 안에서 새로운 미술 개념을 소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인 화가들은 전통적 상징을 사용하고 있으나 르동의 세계는 전혀 달랐다. 르동의 미술은 꿈과 상상 무의식의 신비의 세계이며 작가 자신에 의해 창조된 이미지가 사용되어 어떤 의미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상징주의자였다.

모로 Moreau, Gustave (1826.4.6~1898.4.18)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20세 때인 1846년 F.피코에게 사사하고 2년 후 T.샤세리오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와 친교를 맺었다. 앵그르의 신고전풍의 단정한 데생과 들라크루아의 화려한 색채표현, 그리고 이들 양자를 융합한 샤세리오의 작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52년 《피에타》로 살롱에 데뷔하였다.
57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르네상스회화를 공부한 뒤로는 신화나 성서에서 소재를 딴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작품을 줄곧 그렸다. 작풍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독 속에서 자기의 내적 감정을 표현했다.
면밀한 구성, 정세한 묘사, 광택 있는 색채의 약동으로 상징적이고도 탐미적인 표현세계를 구축하여, 당시로서는 대담한 표현을 했다. 92년부터 파리의 미술학교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자유롭고 진보적인 교육방법으로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 뛰어난 화가를 배출하였다. 이 점에서 상징주의 또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작가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회화의 길을 연 위대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데생·수채화·유화 등 약 8천 점에 달하는 유작은 그의 유언으로 그의 아틀리에와 함께 프랑스정부에 기증되어 모로미술관으로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 《오르페우스》(67) 《살로메의 춤》(76) 《주피터와 세멜레》(96) 등이 있다.


샤반느 Pierr puvis de Chavanes (1824-1898)

모든 확실한 개념에는 그것을 옮길 수 있는 조형적 사고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개념은 뒤죽박죽이 고 혼탁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내면의 눈에 순수한 상태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엉킨 것을 풀어놔야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술작품은 알 속에 동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혼란한 감정속에서 태어나며 이러한 감정세계에서의 사고를 그것이 눈 앞에 확실하게 나타날 때까지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 가능한 한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 다음 그것을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장면을 생각해 낸다. 이야기 중심의 내용보다 시각 언어에서 받은 분위기 추구하였으며 회화의 주제를 근대적인 것과는 딴판으로 기독교적인 것, 고대 향수의 우화적인 요소에서 따오기도 했다.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듯한 부동의 포즈와 그것을 감싸는 차분한 그리고 때로는 단조로운 색채, 화면의 평면성과 그 속에 자리잡은 단순화된 형태, 명상적인 리듬을 타고 큼직하게 잡힌 구도 등, 요컨대 자연주의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등의 그의 상징주의 그림의 특징이다.


르동 Odilon Redon(1840-1916)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 이라는 색판화에 대해 "제목이란 모호하고 불확정적이고 혼란스럽고 애매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 그의 작품은 1880년대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거의 석판화, 에칭, 목판화였다. 사람얼굴을 한 곤충이나 꽃, 떠있는 눈, 잘려진 사람 얼굴, 꿈 환상에서 볼 수 있는 홀린 것 같은 형상이 등장하여 소위 '공상적 주관성' 이라 칭해졌다. 1898년경부터 양식적 변화가 시작되었는 데 흑백 대조가 밝은 색채로 대치되었으며 파스텔, 수채화등을 사용하고 신화와 종교적인 주제, 꽃 등 낙천적이고 즐거운 환상의 세계표현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시작을 르동으로 보는 이유는 "나의 독자성은 가능하다면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는 법칙에 적용시켜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인간과 같이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그의 주장 때문이다. 르동의 환상적 세계는 뿌리없는 황당무계가 아니며 그의 환상의 씨앗은 면밀히 관찰된 현실에 있었다. 그는 무의식을 중시하였으며 환상적 상징적 세계의 조형적 실현을 하였다.


앙소르 James Ensor (1860-1949)

보쉬와 브뤼겔의 후예답게 괴기하고 환상적이며 풍자적인 그림을 그린 그는 거미, 조개, 박제 동물, 해골인간 등 동화이야기를 상상력으로 결합시킨다. 그는 인간의 허위와 도덕성의 문제 환기시키고자 하였으며 급격한 산업화에 반대하여 순수한 사회를 동경했다. 이러한 현대적인 종교화에서 시니컬하고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반영됨을 볼 수 있다.


뭉크 Munch, Edvard (1863.12.12~1944.1.23)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노르웨이의 화가. 뢰텐 출생.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성격자였으며,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결핵으로 여의고, 그 자신도 병약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84), 급진적인 그룹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1889년 한여름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보내고, 신비스러운 밤의 불안을 잡아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등을 그렸다. 90년 파리로 가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으나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목판화(木版畵)와 피사로와 로트레크의 작품이었으며, 고갱과 고흐의 매력이었다. 92년 가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는 말라르메 등과 사귀고 입센을 알게 되었으며,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聯作)을 완성하고, 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봄》 《질투》 《절규》 《다리 위》 《저녁시간》 《죽음의 방:The Death Chamber》 등의 작품이 있다.

25. 야수파

"야수파"는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의 전시를 보고 '야수들 사이에 있는'라고 하는데서 용어가 유래되었으며, 야수파의 대표작가 마티스는 '수단의 순수함으로 복귀하려는 용기,이것이 바로 야수파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
야수주의는 급작스럽게 태어났다기보다는 인상주의적 감각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보다 강렬한 감동에 대한 목마름에서 출발한다.
중류계급의 고상함과 아카데믹한 꾸밈 그리고 암시적이지만 모든 것을 숨기는 아르누보적 우아함등의 판을 치던 시대에 마티스,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죠르주 루오, 라울 뒤피 및 군소 작가들은 대담하고 다시의 화면에서 거의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솔직한 표현을 위해 직접성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야수파들은 세기말적인 슬픔과 내성 그리고 상징주의 문학의 탐미성을 모두 벗어던지고 인상주의의 직접적이고 기쁨에 찬 자연의 포옹을 재생시키는 한편 후기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는데 만족했다.
이들은 모두 색채를 이전의 낡아빠진 묘사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야수파는 새로운 실험정신을 발휘한 작가의 색채를 통해 표현적 감정적 힘을 표현하고 과거의 전통을 깨는 것이다. 야수파는 넓은 추상적 색면을 중요시하여 묘사적 기능에서 조형적 자유를 추구했다. 따라서, 넓은 색면을 점차 추구하여 장식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세잔의 색면과 다른 것은 세잔은 보다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그 의미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색채 사용이 고흐의 고정을 계승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야수파는 양식적인 변화에 주력하여 내용보다는 형태왜곡, 추상적 색채가 패턴화된 화면이 형태를 이루고 그림은 장식화된다. 일종의 조형적 표현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야수주의의 형성에는 3개의 그룹으로 나뉠수 있는데 파리 국립 미술학교 귀스타브 모로를 중심으로한 마티스, 마르케, 망갱, 퓌이, 샤투파로 알려진 블라맹크,앙드레 드랭 그리고 르 아브르 출신의 프리에츠.뒤피,브라크이다.
야수파 화가들은 반고흐와 고갱의 작품 속에서 예술의 본보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야수파의 색채의 항연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1904년과 1906년에 전시된 세잔느의 회고전이 야수파 화기들의 전향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야수파 화가들은 강한 개성과 기질,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화가들이었다. 야수주의의 일관된 특성을 추출해 내기란 매우 힘든데, 이론가와 이론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색채의 강렬함이다. 오직 순색조에만 의존하고 각 색조간의 직접적인 대비,거친 터치,종래의 투시법, 양갑, 명암법을 무시하고 색조의 뉘양스,전조를 묵살한다. 또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표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상주의는 명암과 광선의 효과를 색채에 의해 묘사하려 하였지만 야수파 화가들은 색채 자체에서 광선이 배어 나오기를 원했으며 광선이 색채의 조화 및 광휘와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야수주의 1907-1908년 주요 화가들의 관심이 색채로부터 입체감,양감,중량감,선으로 바뀌어지면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드랭과 블라맹크의 작품은 1908년 부터 색채가 어두워지고 구조적으로 변하며 야수파의 본질을 끝까지 유지했던 화가는 마티스와 뒤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티스 Matisse, Henri (1869.12.31~1954.11.3)

프랑스의 화가. 북(北)프랑스의 카토 출생.
처음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로 전향하였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아카데믹한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루브르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고 있는 사이 G.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학교 교실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의 인상, 11∼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가 있다. 그 후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져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23년경부터 30년대에 걸쳐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49년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고 니스에서 죽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세계 각국에 존재하고,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된다.


드랭

앙드레 드랭은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파리의 작은 화실에 다니고 있었는 데, 그는 마티스의 매우 실험적인 작품에 대하여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 후 마티스와 고갱의 작품을 감사하면서 고갱이 추구한 화품, 즉 전통적인 원근법을 없애 버리고서 화면을 응축시켜 장식적인 단위가 되게끔 한 것을 보고 그의 작품의 기풍을 확립하게 된다. 타오르는 강렬한 빨강, 초록, 노랑의 풍경화를 전시하면서 자연적인 외양에 의존하지 않고 상상력에 기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1905년부터 그는 볼라르가 의뢰했던 템즈간 시리즈에 열중하였으며 다양한 빛의 특질과 떠도는 안개의 짙고 옅음을 날카롭게 표현했는 데, 블라맹크와는 달리 개성과 주관이 합치된 인상파의 재해석쯤으로 이해하면 좋다. 또한 위의 작품에 임할 때의 그의 색채에 대한 표현은 어느 때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조화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이후의 드랭은 야수파의 표현은 아니었다.


블라맹크

특히 블라맹크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으면멋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원시적인 충동과 물결치는 색선과 강렬한 색채들을 이용한 충동적 작품을 남겼다. 그는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그의 회화와 조각에 결정적인 자극을 선사한다. 1906년 앙데팡전 이후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물감이 회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제 선택과 구성은 확실히 인상파에서 연원하고 있으며 실로 그의 구성요소의 배치방법은 피사로와 인상주의와 매우 가깝다.

26. 입체파(Cubism)

20세기 초 야수파(포비슴)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遠近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드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 입체파의 탄생

“자연을 원통형·구체(球體)·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밀 베르날에게 보내는 편지, 1904년 4월)라고 하여 “색채 속의 면(面),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G.가스케 《세잔》) 등을 제작목표로 한 세잔이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07년 살롱 도톤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構築的)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球體)·삼각추(三角錐)·원통형·입방체(立方體)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큐비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는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 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立體:Cube)란 최초로 비평가인 R.보셀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셀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 차례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새로운 화면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奇矯)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피카소), “내게 있어 큐비즘이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인 표현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브라크).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明暗)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우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고, 피카소는 홀타 데 에브로의 에스파냐 풍경을, 브라크는 세잔과 같이 에스타크의 풍경을 발표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直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쌓아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2. 분석적 입체파

세잔풍의 입체파에서는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亂反射)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 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 ‘비구성(非構成)’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이다. 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는 물체는 일단 일상 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顯在)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 ‘물체 그 자체’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 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 존재로서 정착시킨 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視點)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多元的)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다.

3. 종합적 입체파

1912년 입체파는 ‘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물론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 ‘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에 다다이즘은 더욱 철저한 콜라주를, 쉬르레알리스트는 포토몽타지를 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파의 현대적 발상의 하나였다. 입체파의 종합적인 전람회는 1911년의 살롱 데장 데 팡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 출품자에는 앞서 말한 4인 외에 들로네, 뒤샹, 비용, 로랑생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소박한 화가로서 알려진 H.루소의 작품에서도 입체파적인 조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입체파의 색채 경시의 경향을 다시 문제삼아, 다채로운 색을 동시적인 존재로 바꾼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며, 그의 이론이 마케, 마르케, 클레를 중심으로 한 청기사(靑騎士)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J.그리스를 전형적인 입체파 화가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분석적 입체파에서 종합적 입체파로의 전환에 미친 그의 공적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사실 J.그리스의 경우 후년의 피카소, 브라크에 비하여 입체파에 몸바친 경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독일의 입체주의자로는 보통 슐레머, 바우마이스터를 들고 있다. 운동으로서 입체파의 역할은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멸해가나, 그 후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피카소

1920년대부터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피카소는 입체주의 그림과 장엄한 고전양식의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신고전주의적 기법의 드로잉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내었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작품 또한 아주 다양한 데 다소 해학적인 대규모 조각과 함께 초현실주의 조각도 제작 하였으며 <게르니카> 같은 갈등의 이미지들을 그렸는가 하면 평온한 아름다움을 주는 섬세한 에칭과 축제분위기로 가득찬 장식회화도 제작하였다. 1947년부터는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대부분 자신을 풍자하는 작업을 하였다.


후앙 그리

피카소와 브라크 외에 이들의 큐비즘 미학을 이들보다 오히려 대중에게 잘 전달했던 작가로서 후앙 그리가 있다. 그는 1912년 경에 분석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주고 큐비즘 운동이 약해지기 시작한 1914년 경에 종합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준다.


레제

레제는 입체파 미학을 기계미학의 추구(운동감)를 위해 도입한다. (인체를 튜브형태로 묘사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을 "튜비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들로네

들로네는 1909년 경의 에펠탑 연작에서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색채를 지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에 그려진 <창>시리즈와 <해, 달>연작에서는 비구상 계열의 순수 색채 회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뽈리네르는 들로네와, 또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작품을 보여준 쿠프카나 피키비아 등의 작품경향을 일컬어 <오르피즘>이라 부른다. ) 오르피즘은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에서 따온 말로 (자신의 싯구에도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색채의 율동성과 색채의 프리즘 효과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오르피즘은 그래서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혹은 순수색채적 큐비즘이라 불려지게 된다.

27. 독일 표현주의

20세기 초 주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예술운동. 특색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自我)·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에 있다.
이 운동은 우선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연극·영화·음악에까지 미쳤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베를린의 《슈투름(폭풍)》지(誌)의 주간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보급한 것이며, 이 경우에는 1910~20년에 벌어진 모든 반인상주의(反印象主義)를 표방하는 운동의 총칭이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광의로는 시대를 초월한 유럽 미술의 저류(底流)의 하나이다. 즉, 지중해 세계에 대립되는 북방 게르만의 풍토를 반영하고 조형적인 ‘형식’과 그 자율성에 대해 혼의 힘과 그 분출을 특징으로 하며,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프랑스 회화의 범국제적인 보편성과 비교하여 표현주의를 특징짓는 강한 정신체험, 가시적(可視的) 세계를 초월한 환상, 때로는 냉혹·잔인할 만큼의 분석과 풍자는 위기적인 시대상황에 찢긴 개인의 미와 윤리에 수렴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주의의 선구는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반인상주의의 입장에 섰던 뭉크, 호들러, 앵소르, 고흐, 고갱의 1885년부터 1900년에 걸친 화업(畵業)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의 박진성과 평행하는 이들 화가들의 주관적 표현은 드라마틱하고 또한 집념에 가까운 테마를 소수의 강렬한 색채와 대비시키고 왜형(歪形)된 포름(형식), 단순·긴밀한 구도, 선의 그래픽한 예리함과 역동성(力動性)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조형적 특색은 그대로 독일의 표현파 작가에게도 공통된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는 세 그룹이 있다.

첫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그룹으로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로틀루프 외에 놀데, 페히슈타인도 참가하고 연차전(年次展)과 집회가 조직되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포비슴과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파내고, 격앙된 색채와 예리한 관찰로써 대도시의 가두풍경을 그린 키르히너이다.

둘째는 10년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코코슈카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에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논문 및 들로네(클레의 번역에 의하여), 레제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전위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약 15개국 90명의 작가와 366점의 작품을 모아 일찍이 보지 못한 최대의 국제전을 열었다.

셋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1년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靑騎士) 그룹이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야우렌스키, 마르케, 쿠핀,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 작가(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 러시아 작가(말레비치)를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종합의 시도는 ‘청기사’ 운동이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이 밖에 베크만, 그로스 그리고 여류화가 모다존 베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표현주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재차 그룹을 결성하지도 못한 채 나치스 체제의 발흥과 동시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개별적으로 어려운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혹은 스스로 붓을 꺾고 예술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벨기에에서 일어난 플랑드르 표현파가 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코브라’ 그룹(알레신스키, 아펠)의 추상적 표현주의, 초기의 루오, 그로메르 등의 화가도 표현주의의 진영에 넣을 수 있다.
조각에서는 확대된 인체(人體)의 모습을 추구한 렘브루크, 농민의 중후한 종교성을 탐색한 바를라흐가 있다. 표현주의 건축은 최근의 연구에서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환상적 형태와 색채에 특색을 보인 T치히와 타우트를 들 수 있다. 문학·연극에서는 베데킨트, 트라클, 카이저, 조르게, 괴링, 베르펠, 하인리히 만 등이 있고, 음악에서는 쇤베르크, 힌데미트 등을 대표적 작가로 꼽는데, 이 두 사람은 한결같이 영감에 의하여 파악된 감정의 표출과, 자아감정(自我感情)을 고양시키는 것을 기조로 하여,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에 의한 예술적 변형에 특색을 나타내었다. 또한 표현주의는 대도시의 실내장식·포스터·진열장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특히 영화사의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슈투름’의 세 화가(헤르만 바름, 발터 뢰리히, 발터 라이만)가 협력한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칼리가리 박사》(1919)는 그 금자탑(金字塔)이라 할 수 있다.

28. 다리파 (Die Bruke, 1905 - 1913)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파(畵派)로써 1905년 드레스덴에서 E.키르히너, K.슈미트로틀루프, E.헤켈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당시 국제적으로 고조되고 있던 혁명정신을 회화상으로 실현하는 다리가 되고자 한 것이다.
반속정신(反俗精神), 고흐·고갱·뭉크에 대한 열중, 흑인조각에 의한 계시(啓示), 대담한 데포르마시옹과 원색과의 콘트라스트 등에서 이 운동은 프랑스의 포비슴에 호응한 것이다. 그러나 포브가 순색(純色)과 2차원적 구성의 순조형적인 문제를 다룬 데 대해 이 화파는 정열이나 불안의 드라마가 중심문제였고, 회화의 방법 자체보다도 내적인 충동표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인으로는 E.놀데, M.페히슈타인, C.아미에, A.갈렌 칼렐라, 반 동겐, O.뮐러 등도 참가하여 리베르만이 중심인 ‘분리파(分離派)’의 아카데믹한 인상주의에 대립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그 후 10년 ‘자유분리파’와 ‘신분리파’로 분열되었다가 13년 내부의 불화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 화파는 20세기 표현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키르히너 Kirchner, Ernst Ludwig (1880.5.6~1938.6.15)

독일의 화가·판화가. 바이에른주 아샤펜베르크 출생.
1901∼05년 드레스덴의 공업전문대학에서 건축을 배우면서 그 사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H.오프리스트에게 사사하여 회화를 배웠다.
드레스덴에서는 E.헤켈과 사귀었고, K.S.로틀루프와 F.브라이엘 등과 함께 그룹 ‘브뤼케(Die Brucke:다리)’를 창설, 화려한 표현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독일 중세의 목판화나 동양의 풍속화에서 받은 영향이 선과 넓은 평면을 쓰는 화면에 잘 나타나 있으나, 특히 판화에서 두드러졌다. 표현주의회화로서의 본질적인 영향은 E.뭉크에게 받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오세아니아 원주민의 원시미술에서 단순하고 강렬한 조형과 상징적인 표출력을 받아들였다. 브뤼케 그룹은 11년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그 뒤 잡지 《폭풍우:Der Sturm》 및 청기사(Der blaue Reiter) 운동에 참가하면서 표현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거리의 5인의 여인》(1913, 쾰른 발라프·리하르트미술관 소장)과 《베를린의 거리》(1913,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그리고 《누드와 남자의 머리》(1908) 등이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17년 이후는 스위스의 다보스 교외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37년 나치스로부터 퇴폐 예술가라는 낙인이 찍혀 작품을 몰수당하고 탄압받자 절망에 빠져 38년 자살하였다.


에곤 쉴레 ( 1986 - 1918 ) 코코슈카 ( 1886 - 1980 )

이 두사람은 독일 출신이 아닌 빈의 출신이나 비엔나가 지닌 도시적 성겨과 퇴폐주의를 옹호하는 분위기에 반하여 표현주의작가들과의 만남으로 다리파작가들과 흐름을 같이 하게 된다. 쉴레는 Die Aletion에 글이 실리고 「존더분트」전에 초대되면서 알려졌다. 매우 빠른 속도의 연필, 펜, 드로잉에 뛰어났고 마르고 뼈가 앙상한 인물 남녀의 성기 음모등의 거칠 것 없는 표현주의 누드를 삭막하게 그렸다. 그의 인물들은 완전히 적나라한노출로 욕망과 성과 그로 인한 고통받는 인간상을 표현하다. 특히 작가 자신의 누드, 을 통해예민하고 상처받는 허무한 인간을 그렸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선묘가 두드러지는 점이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선이 색채보다 이상적으로 작품을 특징적으로 만들고 있다. 한편 코코슈카는 화단의 테러, 미친 코코슈카로 불리며 1908년 데뷔 부터 폭력적인, 성 , 남녀관계의 심리, 인간 영혼의 비극적 상태의 죽음을 주제로 작업했다. 그는 미술분아니라 연극에서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의 그름은 신경질적인 가는 선과 내성적 분위기의 딱딱하고 선묘적인 초기 시기를 거쳐 다리파 화가들과의 만남 이후 강렬한 색채와 질감에 점차 가미된다. 후이게는 완곡하고 자연을 노래하기도 하나 초기시기의 충격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는 감퇴했다.

29. 청기사파

20세기 초에 활약한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유파로써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1909년 뮌헨에서 결성된 ‘신예술가동맹’에는 당시 신진기예(新進氣銳)의 키르히너, 슈미트 로틀루프,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이 가담하여 종래의 독일인상주의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이 분열·발전하여 11년에 탄생한 것이 ‘청기사’로 11년 말 뮌헨에서 제1회전을 개최하였다.
주도자는 칸딘스키, 마르크, 클레 등이며, 이들은 사실주의(寫實主義) 원칙을 뒤엎고, 색채의 강조와 형태의 과장 등에 프랑스의 큐비즘의 미학을 도입하여 표현주의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칸딘스키 Kandinsky, Wassily (1866.12.16~1944.12.13)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모스크바 출생.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배웠으나, 1895년 인상파전을 보고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그 전후에 이탈리아·튀니지·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908년 이후 뮌헨·무르나우에 살면서, 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집단인 ‘청기사(靑騎士)’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32년부터 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처음 바이마르, 25년부터 데사우)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만년에는 33년부터 프랑스에 정주하여,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 살았으며, 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냕er das Geistige inder Kunst》(21) 《점·선·면:Punkt und Linie zu Fl둩he》(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30. 신조형주의

네덜란드의 P.몬드리안을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일파 또는 그 운동. 신조형주의라고 번역한다. 이 운동을 주도한 몬드리안은 1912년에 파리에서 큐비즘을 공부한 뒤 더욱 이 경향에 빠져, 수평선과 수직선, 또는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이 엮어내는 면과 선 및 삼원색만에 의한 청결한 색채효과의 표현에 힘썼다.
17년 반 도스부르흐, 반톤게르로 등과 잡지 《데 스틸:De Stijl》을 발행하고 순수한 조형회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20년에 발간된 몬드리안의 《새로운 조형:Le n럒 plasticisme》은 그 이론적 해명이다.
이 책은 25년 《바우하우스 총서》의 한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는 이 운동이 바우하우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네오플라스티시즘은  25년  이후  점차  분열하여 32년에는 《데 스틸》도 폐간되었지만, 그가 내건 합리주의 존중과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 주장은 20세기의 반사실적(反寫實的)인 미술운동의 일환으로서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공예·상업미술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고 새로운 조형이념의 창조·실현에 기여한 바가 컸다.

31. 바우하우스(Bauhaus)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구상하여 바이마르에 설치한 조형(造形)학교. 이전에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하였다.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고자 하는 이념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특히 새로운 출발이었던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는 교육내용이 다분히 개인적인 발상에 따라 지도되었다.
그로피우스가 교사로 초청한 이텐, 파이닝거, 클레, 슐렌머, 칸딘스키 등이 대부분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는데, 예비과정을 맡은 이텐은 신비적인 편견조차 가지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최종목표인 건축 수준의 교육은 실시되지 않았으며 초기에는 공예학교적 성격이 엿보였다. 1923년에 이르러서야 그로피우스의 이념이 명쾌한 형태를 잡기 시작하였고 그 해에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일’이라는 테마로 바우하우스의 연구성과를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한편 그로피우스와 이텐 사이에 대립이 생겨 이텐이 바우하우스를 떠났으며, 이텐의 후임으로 모호리 나지가 바우하우스에 참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육방침이 대체로 정착되었다. 그 뒤 약간의 변경이 있긴 하였으나 23년에 정해진 교육과정은 원칙적으로 계승되어 바우하우스의 큰 특색이 되었다. 이 교육과정에 의하면 학생은 우선 예비과정에서 반년간 기초적 조형훈련을 받고, 토목·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글라스 그림·직물·인쇄의 각 공방(工房)으로 진급해서 형태교사로부터 조형의 이념을 배우는 동시에 공작교사로부터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 익히는 체제이다.
다음의 데사우기(期)에 들어서서는 이미 종합적인 시야를 가진 인재가 육성되었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5년 바우하우스는 경제적 불황과 우경파(右傾派)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위기에 이르렀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데사우시에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였다. 바이마르기(期)의 졸업생 알베르스, 바이어, 브로이어 등이 교수진에 참가하자 각 공방도 비약적으로 충실해졌다.
바이마르기와 크게 다른 점은 제품의 공업화였다.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을 추구하였으며, 공방의 작업을 산업계와 실제로 제휴하게 되었다. 데사우기(期)의 바우하우스를 상징적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교사(校舍)(1926)가 있다. 이 교사는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로 통일되어 있다. 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叢書)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 기여하였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데 스틸파와 말레버치의 저작도 포함되어 있어 바우하우스가 가지고 있던 국제적 유대를 알 수 있다. 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나고 한네스 마이어가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세번째로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 안에 있던 형식주의적인 일면을 공격하고, 민중에의 봉사야말로 디자인이 할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건축이 모든 의미로 미적 과정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30년 마이어가 데사우시와의 충돌로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미스 반 델 로에가 교장이 되었으며, 32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데사우를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이것도 33년 나치스에 의하여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망명 교사나 졸업생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특히 미국에서의 바우하우스 시스템 전개는 현저하여 그로피우스와 브로이어의 하버드대학 건축학부, 모호리 나지에 의한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을 거쳐 일리노이공과대학 디자인 학부에 합병) 등은 미국 디자인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졸업생 막스빌에 의하여 55년 울름조형대학이 설립되었다. 68년 슈투트가르트전(展)을 출발점으로 ‘바우하우스 50년 기념전’이 세계 각지를 순회하여 그 디자인 사상을 새로이 조명(照明)받았으며, 바우하우스의 이념(理念)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32.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1940년대 말∼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한 동향. 본래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 후, 미국에서 알프레드 바 2세가 웰스리대학의 강의(1929)에서 ‘칸딘스키와 독일의 추상표현주의’라고 했고, 그가 조직한 큐비즘과 추상예술전(36)의 카탈로그에서 칸딘스키를 가리켜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R.코츠가 H.호프만의 전람회명(46)에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화된 것은 40년대 후반∼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J.폴록, J.뉴먼, M.로스코, C.스틸, W.데쿠닝, F.클라인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와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채의 場의 회화)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점,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후에 M.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되었다.
또 이 용어는 D.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한 조각에도 사용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자기표현을 내세우는 예술과는 이질적인 동향에 주어진 이 용어는 편의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예감한 예술을, 그 어떤 형태로 포괄하려고 하는 자연발생적인 요구에 호응한 것이다. 한편, H.로젠버그가 명명한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도 이 동향에 포함되는데, 특히 폴록 등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가지는 데쿠닝이나 클라인 등의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린다. 추상표현주의는 프랑켄살러, J.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팝 아트 등의 미니멀 아트를 거쳐 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33. 팝아트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구상미술의 경향.
1950년대 초 영국에서 그 전조를 보였으나 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매스 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문화적 시각이미지를 미술의 영역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구상미술의 한 경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술평론가 L.앨러웨이가 54년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팝 아트가 비평용어로 채택되기 이전에 팝 아트적 징후를 상기시키는 작품이 영국에서 나타났다. 즉 49년부터 F.베이컨이 작품에 사진을 활용함으로써 팝 아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나 베이컨은 팝 아트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으며, 54~55년 겨울에 영국의 젊은 작가들의 공동작품 및 그것과 관련된 토론 가운데 팝 아트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관심 아래 조직된 전시가 56년에 열린 ‘이것이 내 일이다’이며, 이 전시에 R.해밀턴이 출품한 《오늘날 우리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팝 아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팝 아트는 사회비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다다이즘과의 근친성을 보여준다.
영국 작가로 해밀턴을 비롯 P.블레이크, D.호크니, R.B.키타이, E.파올로치 등이 있으며, 특히 해밀턴이 바람직한 예술의 성질로 열거하고 있는 것들, 예컨대 순간적, 대중적, 대량생산적, 청년문화적, 성적(性的), 매혹적, 거대기업적일 것 등은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그대로 압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팝 아트의 성격은 미국적 사회환경 속에서 형성된 미술에서 더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세대인 R.라우션버그와 J.존스는 이미 50년대 중반부터 각종 대중문화적 이미지를 활용하였는데, 이들의 작업이 다다이즘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서 네오 다다(Neo dada)로 불려졌고, 그 외에 신사실주의, 신통속주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미국 팝 아트의 대표적 작가는 A.워홀, R.리히텐슈타인, T.웨셀만, C.올덴버그, J.로젠퀴스트 등과 서부지역의 R.인디애너, M.라모스, E.에드워드 키엔홀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작가가 워홀이다. 그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스타나 저명인사들을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묘사하거나 임의적인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하고 예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팝 아트는 텔레비전이나 매스 미디어, 상품광고, 쇼윈도, 고속도로변의 빌보드와 거리의 교통표지판 등의 다중적이고 일상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코카 콜라, 만화 속의 주인공 등 범상하고 흔한 소재들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적 구조를 불식시키고, 산업사회의 현실을 미술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발원하는 반(反)예술의 정신을 미학화시키고 상품미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적 대안의 제시보다 소비문화에 굴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4. 절대주의

지상주의(至上主義), 절대주의. 러시아혁명시대에 화가 K.S.말레비치가 창시한 선구적 추상회화의 이념이다.
큐비즘의 사고방식을 깊이 파고들어 ‘절대적으로 순수한 기하학적 수상’을 표방하여 1913년 말 모스크바에서 흰 바탕에 검은 정사각형을 두 개 연필로 칠한 그림을 전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이 비대상적(非對象的)·비(非)재현적인 순수한 감각 내지 지각을 ‘지상(至上)’의 것, 다시 말하면 회화예술에 있어서의 구극적(究極的)·최후적, 혹은 결정적·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선 사각형을 요소로 하고, 그 뒤 다시 원형·십자형·삼각형 따위를 곁들여, 기본형태만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러한 주장은 15년, V.V.마야코프스키와 그 밖의 다른 전위시인(前衛詩人)의 협력을 얻어 쉬프레마티슴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작품도 《흰 바탕은 흰 방형》(1919)으로 정점에 달한 느낌이 있었으나 2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전하여 소련 정부의 미술정책에 따라 부정되었다.
그러나 국외에서는 환영을 받아 27년에는 이전의 선언을 자세히 설명한 쉬프레마티슴 회화론이 《비대상적 세계》라는 이름으로 바우하우스에서 간행되는 등 독일을 위시한 다른 많은 나라에 영향을 미쳤으며, 같은 계통의 비대상주의(르도첸코), 구성주의(타트링) 등과 함께 추상예술의 원천적 계보를 이루었다.

 

말레비치 Malevich, Kazimir Severinovich (1878.2.23~1935.5.15)

러시아의 화가. 키예프 출생. P.C.몬드리안, V.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예술의 개척자이다.
처음에는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M.F.라리오노프 및 러시아의 전위파(前衛派) 시인들과 친교를 맺고, 쉬프레마티슴(절대주의)을 주창하였다.
1911년 ‘다이아의 잭’이라는 그룹에 참가하여 러시아의 입체파운동을 추진하였다.
12년 파리 여행 후 레제풍(風)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급속히 자기 방법을 발전시켜, 12년의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원·십자·삼각형을 추가하고, 그러한 기본형태에 의한 추상예술을 이론화하여 쉬프레마티슴이라 이름짓고, 15년 V.V.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혁명 직후의 소비에트정부에 의해 모스크바의 국립응용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21∼22년의 미술정책의 반동적 전환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으며, 자유를 잃은 채 지냈다. 그 동안 26년에는 독일에 가서 쉬프레마티슴선언을 상세히 설명한 《비구상의 세계:Die gegenstandslose Welt》를 바우하우스를 통해 간행하였다. 이 밖의 작품에 《흰색 위의 흰색:White on White》(1918) 등이 있다.

35. 다다이즘 (Dadaism)

제1차 세계대전(1914~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8년부터 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23~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우표 등에서 우모(羽毛)·철사·성냥개비·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24년에 초현실주의(surr럂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는 R.리히텐슈타인, J.팅게리, C.올덴버그, H.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

뒤샹 Duchamp, Marcel (1887.7.28~1968.10.2)

프랑스의 화가·조각가. 블랭빌 출생.
입체파 조각가 R.D.비용, 화가 J.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P.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큐비즘의 1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11년 파리에서, 12년 뉴욕의 애머리 쇼에서 동시성을 표시한 회화 《계단을 내리는 나체》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3년부터 다다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쉬르리얼리즘에 협력, 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쉬르리얼리즘전을 열었다.

36.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운동. 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超自然主義]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로 고쳤다고 한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24년부터이며, 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달리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력은 사실(寫實)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A.마송, J.미로, M.에른스트의 작풍(作風)에도 추상화의 경향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기술적으로는 사실성·추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초현실주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다이즘에서 찾아야 한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기성의 전통·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던 만큼  비합리를 예찬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 오브제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채택했으며, 초현실주의 강력한 무기인 에로티시즘에 이르러서는 다다이즘의 비도덕적인 자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기원을 더 먼 곳에 찾아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입체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술운동 속에서 야수파나 표현주의 이상으로, 입체주의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야수파나 표현주의가 원색주의를 택하고 강렬한 감정표현을 주체로 삼았다고 한다면, 입체주의는 종래의 회화를 부정하는 순수한 이념화(理念化)만을 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한 개의 화면을 완벽한 평면으로 보는 관점이며, 일찍이 세잔이 추구한 원근법이라든지 전경·후경의 배치와는 별도의 구성, 별도의 공간개념을 필요로 하였다.
초현실주의 공간은 많은 경우, 상상적 공간이며 비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간접적으로 입체주의의 계열을 잇는 공간파악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때까지 빙산처럼 수중에 가리어 있었던 무의식의 영역에 눈을 돌렸다. 즉, 이성(理性)의 반대의 극점, 합리의 반대쪽의 세계이다. 초현실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술은 이성과 감성, 정신과 마음이 합치는 지점에 그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미 예술은 그러한 조화·통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자아는 밝음과 어두움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자아의 확대라는 문제에 제일 먼저 눈뜬 것은 낭만주의였다. 여기에 미술사가들이 지적하듯, 낭만주의에서 직접 초현실주의로 맥을 잇는 정신의 계보가 있다. 한 예로서 독일 낭만파의 노발리스, L.티크, W.H.바켄로더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술환상》의 저자인 바켄로더는 끝없이 감미로운 도취상태에 그의 예술의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티크는 격렬한 자아의 분열상태 속에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티크의 대표작인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여행》 속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사상의, 이 끝없는 동요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나의 마음을 살짝 만지며 스쳐 지나가는 그 부드러움이 내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려준다면, 나는 행복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게 되고 예술가도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억압할 수가 없다. 불가항력이라고나 말해야 할지. 나의 계획·희망·신념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감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또한 《푸른 꽃》의 저자인 노발리스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꿈의 세계 속에서 방황을 계속했던 사람이다.

독일 낭만파 문학에서 영향받은 독일 낭만파의 회화는 O.룽게나 C.D.프리드리히의 회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무한대의 동경을 그 특질로 삼고 있다. 또 그들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정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초현실주의는 종교감정 대신에 프로이트의 리비도설(說)이 도입된다. 따라서 인간의 숨겨진 부분에 상상력을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적으로 보아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장인 V.위고는 그의 데생에서 이미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오토마티슴)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여류작가 G.상드가 풍경화 속에다 이끼나 꽃 같은 것을 붙인 것도 일종의 콜라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무형체를 지향하였다. 창조력이란 그것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현존하는 것을 뛰어넘어, 비구상(非具象)의 경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낭만주의는 자아를 절대시하고, 그것에 무제한의 능력을 부여했을 때에 비로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가능한 한 참되게 표현하려고 하는 초현실주의의 갖가지 시도는 시·회화·사진·영화 속에서 현실적인 연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것, 비합리적인 것, 우연한 것 등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은 당시의 모순된 현실과 결부되어 예술일반의 인식을 비약시키고 20세기 특유의 환상예술을 발흥(勃興)시키게 된다.
특히 미술의 경우 초현실주는 종래의 공간의식과는 별도의 비현실세계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새로운 테크닉을 필요로 하였다. 도밍게스의 데칼코마니,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M.레이의 레요니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와 같은 테크닉이 충격의 효과를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인 R.마그리트에 이르면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법에 있어서의 데페이즈망과 정신에 있어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최대의 표현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그 밖에 Y.탕기, M.뒤샹, A.자코메티, 레오노르 휘니, J.B.파렝, 투아이앙 등을 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운동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하나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다다이즘의 파괴적인 태도에 만족할 수 없었던 브르통, L.아라공, P.엘뤼아르, F.수포, A.페레, R.데스노스, 크르베르 등이 《쉬르레알리슴 혁명》지(誌)(1924∼29)를 통해 문학 운동을 펼쳤다.
영감(靈感)의 발생을 천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꿈이 지니고 있는 여러 힘의 찬양, 자동기술(自動記述)에 대한 깊은 신뢰, 초현실적 사실의 열렬한 탐구와 평행하여 사회생활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모든 것의 금지를 문제삼고 혁명을 통한 자유의 도래를 그려보며 영원히 온갖 제약을 파기하고, 종교적·정치적 신화를 타도하고 사회의 명령에서부터 해방된 개인의 승리를 보장하려 했다. 또한 문학·예술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종교·정치의 면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대한 수정을 가하는 하나의 주의로서 형성되었다.
1924년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선언》의 발표와 기관지 창간 이후의 수년간, 이 운동의 불길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문학작품으로서는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문체론》, 엘뤼아르의 《고뇌의 수도》, 브르통의 《나자》 등이 이 운동의 실험에 있어서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새로운 기관지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이 창간되고, 초현실주의와 초합리주의가 일체를 이루는 브르통과 엘뤼아르의 공동작 《무원죄수태》, 브르통의 대표시집 《자유로운 결합》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일파의 혁명적 야심은 점차 인간의 미적·윤리적 개념의 전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정치면에서의 직접 행동으로 옮아갔으나, 초현실주의의 이론과 공산주의 이론의 일치에 실패하여, 이 운동은 분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에서 열린 국제혁명작가회의에 참석한 아라공은 소련에서 정치시(政治詩) 《적색전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후일 이 시가 프랑스에 전해지자 이른바, ‘아라공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택한 아라공은 다음해 이 그룹에서 제명되었다.

30년대에 접어들자, J.위녜의 《쉬르레알리슴 소시선(小詩選)》, 브르통의 《새벽》, 엘뤼아르의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시집 《민중의 장미》, 화가인 S.달리의 《비합리의 정복》이라는 편집광적 비판의 방법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나옴으로써, 문학·회화 양면에 걸쳐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초현실주의는 국제선전운동으로 나타나, 36년에는 런던에서, 38년에는 파리에서 브르통, 엘뤼아르가 중심이 되어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이 열렸다. 그 사이 브르통의 《미친사랑》, 엘뤼아르 시집, 로트레아몽의 《전집(全集)》이 출판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브르통은 36년의 에스파냐내란 이래로 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한 엘뤼아르와 드디어 결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이 초현실주의 운동의 재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과 신화의 인식과의 방향으로 쏠렸다. 대전중에 브르통, 베레, 달리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에서 초현실주의의 선전을 계속하였다. 47년 귀국한 브르통이 파리에서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을 열고 공산당과 실존주의자들에 대한 집단선언서 《즉시결렬》을 발표하였다. 이 방향에서 나타난 전후의 대표적 작품은 브르통의 시집 《샤를 푸리에에게 주는 오드》가 있다. 유파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일단 이론적인 면에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미학적인 면에서의 영향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크다.

 

<초현실주의의 기법들>

1. 자동주의 automatisme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의도를 나타낸 대표적 기법으로, 가능한 의식(고정관념,이성들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손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움직임과 형태를 작품화한 것이다. 에른스트가 발견한 프로타주와 오스카 도밍게즈가 작품에 이용한 데칼코마니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오토마티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 분야에서의 오토마티즘은 미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구절들을 이성의 통제없이 무의식적으로 써내려가는 방법을 말한다. 초현실쥐의 미술의 초기인 1920년대에 이 기법이 주로 쓰였으며 대표적 작가로는 마송과 미로가 있다.

2. 프로타주 frottage

에른스트가 1925년 여름에 마룻바닥의 얼룩을 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온갖 환각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한 기법으로, 나무 파편이나 나뭇잎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을 문질러 그림이 떠오르게 하는 수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것뿐 아니라 몇가지 피사물을 의식적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에서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 자체의 우연성을 중시하는 프로타주로 제작한 초기의 34점의 작품은 에른스트는 박물지 (historre naturelle)라는 책자로 출판했는데 여기에 등장한 형상들은 문질러 나타낸 나뭇잎,헝겊 따위가 인간의 머리,괴물,바다 풍경등으로 변모된 것이다.

3. 데칼코마니 decalcomanie 轉寫法

원래는 도기나 유리기구등에 특수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옮겨서 염색하는 기법으로, 회화에서는 미끄러운 성질의 종이에 물감을 칠하고 그것을 접었다가 다시 피거나 또는 다른 종이를 그 위에 대고 눌렀다가 뗄 때 생기는 우연한 효과를 작품에 이용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기법에 따른 우연한 형태 - 산맥, 산림수목, 인간장기 등 - 에 부분적으로 가필을 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영상을 표출하도록 한다. 1935년 오스카 도밍게즈가 그의 과슈작품에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에른스트도 2차세계대전 직전에 종종 이용했다. 예전의 그림붙이기에 사용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리 즉, 완성된 그림을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얼굴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4. 데페이즈망 depaysement 轉置,轉位法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문학에서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로트레아몽의 싯귀는 데페이즈망의 적절한 예라 하겠다. 초현실주의 회화에서는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으므로써 꿈속에서 밖에 없는 화면을 구성했는데, 이는 심리적 충격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데페이즈망의 대표적 작가로는 마그리트를 들 수 있으며 꼴라주와 오브제도 일종의 전위라 할 수 있는데 이 방법들은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데 기여했다.

5. 레이요그램 rayogram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감광 재료 위ㅣ해 물체를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 속에서 추상적 사진을 찍은 것이다. 포토그램과 같은 것으로 파리에 있던 미국의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가 1923년 블룸이란 잡지 4월호 표지에 발표하면서 이 명칭을 붙였다. 후에 그는 자작집에서 레이요그래프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1921년 자비로 출판의 한정판으로 레이요그램 작품을 트리스탄 짜라의 시와 함께 발표한 바 있다.

6. 꼴라주 collage

화면에 인쇄물,천,쇠붙이,나무조각,모래,나뭇잎 등 여러 가지 물질을 붙여 구성하는 기법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에서도 기성품에 손질을 가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물체끼리 조합시키므로써 별개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비유적,연상적,상징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으로 쓰인다. 에른스트는 1919년부터 초현실주의적인 꼴라주작품을 시도했는데, 그의 작품은 잡지,카탈로그, 삽화등의 그림을 부분적으로 오려 아무 관련성없이 재배치하여 부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의 세계를 일깨운다. 또한 1924년 <두 어린이가 나이팅게일에 놀랐다>라는 작품에서는 문짝,손잡이 등의 사물을 꼴라주하여 초현실주의 사상에 부합되는 이미지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7. 오브제

예술과 관련없는 물견,또는 그 부분을 본래의 일상적 용도에서 떼어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재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 발견된 오브제, 환영 오브제, 봉상적 기능의 오브제, 존재적 오브제 등

막스 에른스트

1919년 꼴라주 작업을 했는데 이는 무의식에 이르기 위한 최초의 시도로서 여러 가지 기계도면이나 식물학 도판 그리고 옛 판화와 삽화등을 임의로 오려내어 자유롭게 배치한 작품이다. 손과 겹쳐진 눈동자, 얼굴 부분에 독수리 머리 사진을 붙인 누드의 여인, 사람 형태로 변형된 기계 부품등 평범한 이미지들이 콜라주되어 기이하고 놀라운 상황을 연출한다. 1924년작 < 꾀꼬리에 위협받는 두 아이 >에서도 작운 문틀등의 오브제를 이용한 꼴라주기법으로써 무의식적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1925년에서는 프로타주 즉 나뭇결, 나뭇잎 등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연필로 문질러 우연적 이미지를 얻은 기법을 발견하였으며 숲 연작등에 이를 도입하였다.


앙드레 마송

마송이 회화에서 의도한 것은 브르통의 자동기술과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그려지는 자동묘사 그림이다. 주로 드로잉적 회화, 물감·모래를 혼합한 모래 그림 작업을 한다. 브르통과 알게된 직후 1923-24년에 그는 재빠른 선묘에 의한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성을 격정적으로 나타내었으며 그의 드로잉은 기이한 동물,신화적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호앙 미로

추상적이며 자동주의적 표현방식에 열중한 작가로서 붓의 미끄러짐,회화적 재질감, 행위와 기호의 유희를 통해 독특한 생물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밑그림없이 직접 캔버스에 작업을 기도하여 영혼의 움직임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의 화폭을 자아의 순간적 투영의 장으로 만든다.


살라도르 달리

1930년 편집광적 비평이란 방법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는데 이 기업은 극사실적 묘사에 의해서 체계를 갖는 망상으로서 내용은 비합리적이나 진실인 것 같이 매우 논리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중형상,위치전환,성질전환을 통해서 풍경이나 공간의 공포,변태적 에로티즘,음식에 대한 강박관념등을 소재로 그렸다.


르네 마그리트

마그리트는 벽지 제조회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26년 문학가들과 초현실주의 그룹을 형성하고 1927년 이후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본격적인 이중이미지의 우연한 만남이나 환상세계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그려지는 대상의 세부확대,연관성없는 두 개 사물의 만남, 무생물을 생명있는 미술로 도치, 전혀 다른 모습의 생물체 변형 등으로 제작된다. 그는 서로 다른 의미의 사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거나 사물이 갖는 고유의 이미지를 변형시켜 전혀 다른 의미의 초현실 이미지를 화면속에 탄생시키는 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작가이다.

37. 파리파

파리화파는 양차대전사이에 관용 분위기속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파리에서 실행되었던 모든 종류의 미술 - 형식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초현실주의부터 추상, 창조 그룹의 철저한 형식주의에 이르기까지 - 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브라크, 레제, 마티스, 피카소 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파리화파의 대표자로 칭해진는 것은 '악마들' 로 일컬어지는 표현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이다. 이탈리아 출신 모딜리아니, 러시아 출신 수틴, 프랑스 출신 모리스 위트릴로, 불가리아 출신 파신 등으로 가난과 소외속에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며 비참하게 산 저주받은 보헤미안 들이었다.

모딜리아니

회화공간을 한정한 탈인상주의와 색채를 제한한 큐비즘의 방법을 이용하였으며 아프리카, 그리스, 중세 초기 조각에서 보이는 인물상, 두상 에 관심을 보인 초상화의 대가였다. 그의 초상화들은 개성적인 우아한 선이 길게 늘여 구사되고 있으며 원시 미술에서 유래한 형태를 사용하였다.


카임 수틴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정작 ‘라 루슈’라고 알려진 낡은 저택에서 만난 화가들을 통해 그의 길을 찾은 수틴은 인상주의 분파를 대표하는 보나르 나 루오를 좋아했다. 수틴 작품의 표현주의적 본질은 직관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으며 외견상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되었는 데 이는 월렘 드 쿠닝과 가깝다. 또한 지나치게 격정적인 기질로 인해 고통받은 고흐계열의 화가이다. 그는 부셔지고 찢겨진 듯 한 풍경화 <뒤틀린 나무> , 불안하고 애처로운 듯 뒤틀린 초상화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충격적이고 혐오스런 정물화 <정육점 수소> 와 같은 작품을 그렸다.


줄스 파신

파신은 초기부터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삽화가와 풍자화가로 재능을 보였으며 독일에서 더 명성을 얻었다. 1912,3년 낭만적 분위기의 인물화를 그렸으며,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색조의 그림속에서 유쾌하게 인생을 이끌려 하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1914년에 20년 때에는 미국에 있어서의 모더니즘 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모리스 위트릴로

어릴때부터 알콜중독과 같은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낸 위트릴로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루소의 재능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 의도적으로 소박한 형식의 회화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그가 자란 몽마니의 교외와 몽마르트 교외를 그린 것으로 거친 필치의 질감과 차분한 색채의 경향을 보인다. 그 뒤 그는 피사로의 후기 회화를 연상케 하는 인상주의 단계로 들어갔으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을 계속 반복해서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하며 살았다.

38. 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新卽物主義)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반(反)표현주의적인 전위예술운동. 신현실주의 또는 독일어로 노이에 자흐리히 카이트라고 한다.
이 명칭은 1923년 만하임미술관에서 미술관장 하르트라우프가 기획하여 열린 전람회의 이름에서 나왔다.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에만 전념한 나머지 대상의 실재파악을 등한시하고 비합리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데 반대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한 실재감의 회복을 기도한 운동이다.
주동한 화가로는 베를린의 다다이즘운동에 가담한 G.그로스 및 O.딕스가 있다. 그로스는 처음 디자인 관계의 일에 종사했고, 또 신문이나 잡지에 풍자적인 데생을 발표하여 인정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사회에 직면하자 좌익적인 입장에 서서 독일의 군국주의와 부르주아지에 대해 통열한 비판자가 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아들인 딕스는 사회의 암흑 속에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박진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폭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크라나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밖에 주목되는 화가로는 실내나 정물을 소박한 기법으로 그린 G.슈림프, 기하학적 형태를 골격으로 하여 식물을 그린 A.카놀트 등이 있다. 25년 평론가로는 이 운동을 포함한 후기 표현파의 양식을 마적(魔的)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였다.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이 운동은 박해받아 소멸하였다.

 

그로스 Grosz, George (1893.7.26~1959.7.6)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독일의 화가. 베를린 출생. 베를린 미술공예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상업미술에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사회의 부정과 속임수, 인간욕망의 추악성을 예리하게 파헤친 풍자화를 계속 잡지에 게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Neue Sachlichkeit)로 접근하여 물체의 재질감을 강조하고 강한 실재감을 그리려고 하였다. 1920년대에 그린 《지배자의 얼굴》 《이 사람을 보시오》 등의 화집에서 독일의 자본가·군인의 교만을 통렬히 비판하고, 바이마르체제의 모순을 폭로하였다.
32년 미국으로 가서 뉴욕에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의 교수를 역임하다가 38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작풍도 차차 부드러워져서 과거의 극독한 느낌이 사라지고 한결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더해졌다. 주요 작품에 《소신의 사나이》 등이 있다.


딕스 Dix, Otto (1891.12.2~1969.7.25)

독일의 화가·판화가. 라이프치히 근교 게어 출생.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장식화가로서 수업을 하였다.
1914∼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고, 귀환 후 드레스덴미술학교에서 R.뮐러에게 사사하였다. 19년 드레스덴 분리파의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일하고 23년 다다이즘으로 전향, G.그로스와 함께 노이에 자흐리히카이트(Neue Sachlichkeit:新卽物主義)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으며, 26∼33년 드레스덴미술학교 교수를 지냈다.
35년 이후 나치스의 박해를 받고 제작을 중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보덴호숫가인 헤멘호펜에 정주하면서, 주로 종교적 주제로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작품에 《창녀》 《성냥팔이》 등이 있다.

39. 플럭서스

플럭서스는 1960년대에 독일에서 시작되어 뉴욕과 북구의 수도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일본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펼쳐졌다. 이 운동은 대중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아방가르드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들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으며 게릴라 극장과 거리 공연, 전자음악 연주회 같은 초기의 플럭서스 이벤트는 1960년대와 연결지어 생각되는 성적 충동과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플럭서스 미술가에게는 사회적 목적이 미적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의 주된 목적은 부르조아적인 판에 박힌 미술과 생활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이 용어는 1961년 뉴욕의 갤러리 A/G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회를 알리는 초청장 문구에서 조지 매키우너스가 처음 사용했으며 여러나라의 언어에서 ‘흐름’이나 ‘변화’란 의미를 내포하는 플럭서스 미술은 양식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플럭서스 미술가들의 전형적인 제작 방식은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었으며 많은 미술 형태가 동시에 그리고 불협화음처럼 전개되는 플럭서스 이벤트는 동시대에 등장한 액션이나 후에 나온 해프닝과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보다 유머러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
플럭서스 이벤트는 산책하거나 나무를 태우는 단순한 동작에서부터 미니 텔레비젼으로 만들어진 브래지어외에는 거의 걸친 것이 없는 샬로트 무어맨이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무어맨과 백남준의 공동작품과 같이 대중의 관심을 끈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플럭서스는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레이 존슨 같은 플럭서스 미술가들은 ‘우편미술’을 시도했는데 이는 우편 제도를 전달 방법으로 이용하는 미술로 엽서형태의 콜라주와 그 밖의 소규모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플럭서스에서 탄생시킨 또 다른 미술은 때로는 우편 미술과 협력하여 행해지는 ‘고무도장미술’이다. 플럭서스 미술작품은 기상천외하며 부조리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그 밑에 깔린 태도는 후대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아트의 등장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작가로 요셉 보이스, 게오르게 브레히트, 로베르 필라우, 요코 오노, 샬로트 무어맨, 백남준 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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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예사조의 흐름

한국 문예사조의 흐름
 1.한국 문학 사상의 바탕
(1)무속 신앙(巫俗信仰;shamanism)과 동물 숭배 사상(動物崇拜思想;totemism)  
이 두 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으로 후대에 외래 사조를 수용할 때 절대적 지주의 역할을 하였다.
 ■ 무속 신앙 :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정령(精靈)이 깃들여 있다는 생각을 근본으로 한다. 이 정령의 힘을 의지하여 원화소복(遠禍召福)하려는 주술적 행위나 특정한 사물을 꺼리는 금기(禁忌,taboo)의 심리는 여기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 동물 숭배 사상 : 어떤 부족이나 씨족 집단이 특정의 동물과 주술적, 종교적 또는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믿는 관념. 고대 건국 신화에 등장함.
(2)외래 사조의 주체적 수용(受容)
 ■ 유교 사상 : 충효와 인의(仁義), 입신양명(立身揚名), 안빈낙도(安貧樂道) 등 현실적 삶의 태도를 작품화하였다.
 ■ 불교 사상 : 일찍부터 토착화된 불교 사상은 특히 제행 무상(諸行無常), 인과응보(因果應報), 윤회사상(輪廻思想), 인연설(因緣說) 등이 우리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도교 사상 : 유교와 대립적 입장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자연 또는 초월적 세계를 추구하였다.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 허무 사상, 신선 사상, 현실 도피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2.한국 문예사조의 주류적 계보
[무속신앙, 동물 숭배 사상] →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의 융화] → 실학 사상 → 개화 사상
                                                               
→  계몽주의  →  낭만주의 . 사실주의  →  계급주의 . 민족주의  →  순수문학파 →
 
모더니즘[주지주의, 초현실주의]  →  생명파 . 청록파  →  전후 문학

3.한국 문예사조의 흐름
(1)근대화의 싹이 된 실학 사상 :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에 나타난 경제적, 사상적 측면에서 전근대성을 극복하려는 노력 .사상적으로 전근대적 공리공론(空理空論)보다 실질을 숭상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경향을 보여 준다. 박지원 등의 비판적 문학이나 판소리. 사설시조 등 평민 문학을 통해 형성된 실학파의 문학은 19세기 후반의 개화 사상으로 이어진다.
(2)전근대성 탈피에 앞장 선 개화 . 계몽 사상
 ■ 개화 사상 : 봉건적 전통 사회를 근대적 시민 사회로 전환하고자 한 지도 이념을 말한다. 신교육의 실시, 신문 . 잡지의 발행, 언문일치(言文一致) 문장 운동, 외국 문학의 번안, 번역 등이 현실화되어 문학에서의 근대화 여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문학은 서구의 근대 문학적 성격을 가미하여 신체시, 신소설 등의 양식을 창출하였다.
 ■ 계몽주의 : 1910년대의 문학은 최남선, 이광수의 '2인 문단 시대'로 요약되는데, 이들은 19세기 말의 개화 사상 . 독립 사상을 바탕으로 시대적 문제들을 한층 심화시키면서 근대적 인간상을 형상화한 계몽주의적 문학을 표방하였다. 서구 문명의 도입, 전근대적 사회 비판, 새로운 자유시의 추구, 자유 연애, 교육의 중요성 등을 주 내용으로 제시한 문학이다.
(3)문예사조의 정립(1920년대 전반)
 ■ 낭만주의 : 3.1운동 직후의 암울한 좌절적 분위기가 시에서는 감상적(感傷的) 낭만 풍조로 나타났고, 소설에서도 우울하고 패배적인 분위기와 그런 인간상이 묘사되었다. '폐허, 백조' 동인들의 작품이 된다.
 ■ 사실주의 : 앞 시대의 관념적 계몽주의를 탈피하려는 시도로 김동인을 중심으로 한 창조 동인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서민들을 인물로 선택하여 개인과 사회의 구체적 관계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4)문학 운동의 두 가지 대립적 상황(1920년대 후반)
 ■ 계급주의 문학 : 프로(프롤레타리아) 문학. 무산자(無産者) 문학. 계급주의적 발생에 의해서 무산자들의 계급적 자각과 이에 의한 대립 의식을 표현하려는 문학이다. 이에 따라 프로 문학은 신경향파에서 그 싹이 보이기 시작하여 카프에 의해 하나의 형태로 굳어졌으나, 1930년대 중반에 카프의 해산과 때를 같이 하여 소멸되었다.
 ■ 국민문학 운동 :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카프 계열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문학자들이 주창한 문학 운동. 계급 위주의 이데올로기 문학에 반발하여, '민족' 개념이 문학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함을 역설하고, 우리 민족의 문학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5)순수문학과 모더니즘(1930년대 전반)
 ■ 순수문학 : 1920년대 후반의 목적 문학(계급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발로 문학의 예술성을 자각한 문학적 경향. 특히 시문학파에 의해 주도된 순수시는 우리말의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순수 서정의 세계를 노래해 한국시의 예술성을 높였다.
 ■ 모더니즘 : 시의 회화성, 지적인 언어를 강조한 이미지즘(imagism, 이를 주지주의로 번역)적 경향과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불안, 절망을 비논리적 언어로 형상화한 초현실주의적 경향으로 요약된다. 이 사조는 1950년대 '후반기(後半期)' 동인에 이어져 보다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6)새로운 전통의 창조(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
 ■ 생명파 : 순수시의 세계를 더욱 심화하여 시작(詩作)의 과제를 인간 특히 생명 의식의 고양(高揚)에 두었다. (유치환, 서정주, 김동리)
 ■ 청록파 :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한국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7)전후 문학의 다양한 모습 : 광복 이후의 사회적 격동기를 거쳐 동족 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1950년대 문학은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존주의적 경향을 위시하여 후반기 동인 중심의 후기 모더니즘 운동. 동족 상잔의 비극성을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 등이 그 중요한 경향이다.

[보충 설명]
▽작품과 그 배경 사상
 무속 신앙-구지가, 혜성가, 도솔가, 처용가 등
 동물 숭배 사상-단군 신화, 박혁거세 신화, 금와 탄생 설화, 구지가(김수로왕 탄생 설화)
 유교 사상-안민가, 단심가, 사미인곡, 속미인곡, 강호사시가 등
 불교 사상-제망매가, 원왕생가, 금오신화, 구운몽, 심청전 등
 도교 사상-장진주사, 선상탄, 구운몽, 상춘곡, 농암가 등
▽한국 현대 문학과 서양 문예사조 : 서구의 문예사조는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전시대에 대한 반동 또는 계승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사조를 우리 나라에서는 1920년대 이후 동시 다발적으로 수용하여 우리의 문학적 현실에 접목시켰다. 따라서 한국의 문예사조는 서양과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계몽주의 : 사회적 변동기에서 그 시대 선각자들에 의해 형성되고 주도된 대중 계몽의 이념을 가리킨다. 한국의 경우에는 전근대적 유교 이념의 극복을 중심 과제로 삼았다.
▽상징주의 기법 도입 : 1919년 김억에 의해 상징시의 기법이 도입되어 한국시에 일반화되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 1920년대 소설은 대체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표본실의 청개구리' '감자' 등은 자연주의적 경향을 띤 작품이다.
▽카프(KAPF;한국프롤레타리아 예술 연맹) : 계급주의 문학을 표방한 예술 단체. 박영희, 김기진 등이 주도
▽국민문학파 : 시조 부흥 운동, 문학의 순수성 옹호 운동 전개. 이광수, 이병기, 김동인, 양주동 등
▽시문학파 : 1930년 김영랑, 박용철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주지주의 : 최재서, 김기림 등이 영.미의 주지주의 이론을 소개하고 김광균이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생명파의 두 시인의 경향 : 유치환-허무와 의지 형상화. 서정주-강렬한 육감적 표현
▽청록파 세 시인의 경향 : 조지훈-선적(禪的) 풍류. 박목월-향토적 간결미. 박두진-청결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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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사조(文藝思潮)

문예사조(文藝思潮)
문예사조(文藝思潮)
- 출처: 이문수의 국어사랑( http://munsu.new21.org/main.htm )


1. 문예 사조의 근원과 개념

(1) 문예 사조의 근원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 헬레니즘(Hellenism)
㈀ 발생지 : 그리스(희랍)
㈁ 특징 : 인성(人性)을 중시하고, 감성·지성·현세·자아적이다.
㈂ 영향 : 고전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전개된다.

② 헤브라이즘(Hebraism)
㈀ 발생지 : 히브리(유대)
㈁ 특징 : 신성(神性)을 중시하고, 덕성·내세·신성적이다.
㈂ 영향 :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으로 전개된다.

(2) 문예 사조의 개념 : 뜻을 같이 하는 문인들이 유파(流派)를 형성하고, 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하나의 사상적 흐름을 형성한 것을 일컫는다. 이는 문학사상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시대적. 집단적 사조라는 점에서 문학 사상과는 다르다. 또한 문예 사조는 대체로 서구에서 형성된 것이며, 우리 현대 문학도 그 영향을 받았다.

<보충 정리>
* 문예 사조의 계보(系譜)
1. 헬레니즘→고전주의(17C)→신고전주의(주지주의)
2. 헤브라이즘→낭만주의(18C)→상징주의→유미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3. 헬레니즘→사실주의·자연주의(19C)→(심리주의)

2. 문예 사조의 전개와 그 특질

(1)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
17∼18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한 면밀한 주석과 함게 시작됨.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작품들을 모범으로 삼고 거기에 들어 있는 공통적인 특징들을 재현하려는 경향임.
ⓛ 특징 : 개인의 자유 분방한 재능의 발휘보다는 조화, 균제(均齊), 전아(典雅) 등 형식적 조화와 완성의 미를 추구함.
② 대표적 작품 : 단테의『신곡』, 괴테의『파우스트』, 라신의『소송광』, 몰리에르의『수전노』, 세익스피어의『햄릿』, 벤존슨의『말 없는 여자』, 실러의『군도』, 드라이든의『경이의 해』등.
③ 20세기 초 영국에서 흄, 엘리어트 등 주지파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로 이어짐.

(2)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고전주의의 몰개성적 성격에 반발하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독일, 프랑스에서 일어나 영국으로 전파됨.
① 특징 : 형식이나 질서의 구속을 거부하고, 합리적 사고 방식이나 이성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활동과 사상 감정의 분방함을 지향하여, 멀리있는 것과 현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을 기조로 함. 성격은 주관적, 정열적, 개성적, 신비적, 초자연적, 혁명적이다.
② 대표적 작품 : 워즈워드의『수선화』, 노발리스의『밤의 찬가』, 뒤마의『몽테크리스트 백작』, 바이런의『차일드 하롤드의 순례』,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발자크의『농부』, 호든의『주홍 글씨』, 위고의『레미제라블』등 우리나라의 경우는 『폐허』, 『백조』, 동인들이 이 경향을 띰.

(3)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
낭만주의의 비현실적 성격에 반발하여, 19C에 일어난 사조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임.
① 특징 : 사물을 과장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 표현하고, 사물을 대략 그리지 않고 구체적 세부를 드러내며, 상상력이나 미의식으로 대상을 미화하지 않고 추악한 것도 있는 그대로 묘사함.
② 대표적 작품 : 근대 산문문학의 대표적 조류임. 모파상의『비계덩어리』, 플로베르의『보봐리 부인』, 스탕달의『적과 흑』, 발자크의『인간 희극』, 투르게네프의『첫사랑』, 디킨스의『올리버 트위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 우리나라는『창조』를 중심으로 일어났음.

(4)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19세기 사실주의의 급진적인 경향으로 자연 과학적 결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도 자연물처럼 인과율이라는 자연 법칙에 따라 환경 본능 유전 인자 등에 의해 그 일생이 운명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사상을 배경으로 함.
① 특징 : 해부학 생리학 등과도 연관된 실험적, 분석적 수법을 쓰며, 사회의 추악한 암흑면의 폭로, 우상의 타파 등이 주 소재임.
② 대표적 작품 : 에밀 졸라(창시자)의『목로 주점』, 모파상의『여자의 일생』,『진주 목걸이』, 입센의『인형의 집』, 하디의『테스』, 존스타인 백의『분노의 포도』, 염상섭의『표본실의 청개구리』등.

(5)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조로, 사물 정서 사상 등을 상징을 통해 암시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임.
① 특징 : 사실주의에 반발하고 낭만주의를 계승한 것으로서, 낭만주의가 감각적 대상에서 쾌감을 느끼는 데 그친 반면, 상징주의는 감각의 대상이 암시하는 또 다른 세계(이상 추구)를 찾아내고자 함.
② 대표적 작품 : 말라르메의『목신의 오후』 『반수신의 오후』, 베를레느의『화려한 향연』, 랭보의『지옥의 계절』, 게오르그의『동맹의 별』, 다눈치오의『새로운 노래』등. 우리나라의 경우는 황석우, 주요한, 김억 등이 여기에 속함.

(6) 유미주의(唯美主義, Aestheticism)
미의 창조를 목표로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사조이고, 이는 탐미주의라고도 하며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에 포함된다.
① 특징 : 자연 배격, 인공 중시, 형식과 기교의 중시, 감각적인 것 중시, 개성의 신장 등을 목표로 하므로 퇴폐주의적 악마주의적 경향도 나타남.
② 대표적 작가 : 포우,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김동인의『광화사』 『광염소나타』등.

(7) 데카당스(Decadence)
문학이나 예술의 정신이 쇠퇴하여 현실보다 이상을 읽고 자의식 과잉으로 일을 벌여서 하기를 좋아하게 되고, 관능적인 미를 추구하며 퇴폐적이다. 19세기 말엽 예술지상주의적, 탐미적 문학에 현저하나 일반적으로는 위대한 시대가 끝날 즈음 그러한 특질이 나타난다.

(8) 다다이즘(Dadaism)
20세기에 들어와서 현실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의지를 보인 사조로, 현대 지식인의 정신적 불안과 공포에 대한 저항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트리스탄 짜라에 의해 전개되었다.

(9)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자동기술법을 바탕으로 하여 무의식의 세계를 표출하려는 경향인 초현실주의가 다다이즘을 흡수하여 일어났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 버니니아 울프의『세월』,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상의『날개』등이 있다.

(10)주지주의(主知主義, Imagism, Modernism)
1912년 경 엘리어트, 흄, 파운드 등을 중심으로 한 영미 시인들에 의한 시 운동. 그들은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 즉 형상이라 생각하여서 시의 음악성 및 운율보다는 시각적(회화적) 요소가 강조되었다. 한국에서는 1934년 최재서에 의해 소개된 후 김광균, 정지용, 장만영, 장서언 등의 시인에 의해 이 경향의 작품들이 쓰여졌다.

(11) 심리주의(心理主義)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주의, 또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수법의 소설이 시도되어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경향이 더욱 깊어졌다. 조이스, 프루스트, 울프 등이 대표적 작가다.

(12) 실존주의(實存主義)
사르트르의『구토』와 카뮈의『이방인』, 카프카의 『변신』등이 중심이 된 실존 철학을 바탕으로 한 실존주의 소설은, 전후의 허무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실존적 자각(자아 발견)과 건설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한다.

(13) 행동주의(行動主義)
제 1차 세계대전 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내제하는 허무주의(nihilism)에 대한 비판과 재건의식에 의해 일어난 문예사조다. 대표적 작가로는 앙드레 말로와 생텍쥐페리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밖에서 포착한다는 것이다.

(14) 반소설(反小說,nouveau-roman,anti-roman)
로브그리예 등 프랑스의 소설가를 중심으로 하여 전통적인 소설의 기법이나 약속을 깨뜨리고 새로운 양식의 소설을 창조하려는 운동이다.

(15)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G. 쉬타인이 말한 것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정치와 사회를 등진 채 문학의 새로운 모습을 재 발견하려고 노력한 미국의 전쟁세대를 가르키는 말이다. 대표적 작품은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솟는다』이다.

(16)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성난 젊은 세대인 이들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하층 중류 노동 계급 출신으로서 기성 세대의 정치 문화에 대한 반발과 혐오를 표출. 대표적 작품은 오스본(J. Osborne)의 희곡『성난 얼굴로 돌아 보라』이다.

(17)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1950년대 미국의 젊은 세대로서, 현실사회와 문명에 대한 외면에서 출발하여 기성 권위나 도덕을 거부하고 방랑 타락하여 원시적 감정을 주로 하는 사상. 대표적 작품은 잭 케루악(Jack Kerouac)의『노상에서(On the road)』

(18) 하드보일드 문학(Hard boiled literature)
비정 냉혹의 뜻으로, 제1차 대전 후의 미국의 젊은 작가들, 특히 헤밍웨이의 문학 경향을 말한다. 감상에 빠지지 아니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문체로서 주로 색다른 사건을 취급하는 문학의 한 형식이다. 대표적 작품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이다.

(19) 해빙기 문학(解氷期文學)
소련의 에렌부르크를 중심으로, 목적적 획일적 당문학에 반발하여 일어난 작가들의 문학 활동을 말한다. 그들은 공산 독재에 항거하여 자유주의적 개성 존중의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당과 정부의 탄압을 받았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에렌부르크의『해빙기』, 파스테르나크의『의사 지바고』, 솔제니친의『암병동』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나리차의 『미처 못 다 부른 노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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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Surrealism, 超現實主義]예술 | 브리태니커

(프) Surréalism.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학 및 시각예술 운동.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과거 유럽 문화와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이성주의가 결국은 파괴를 야기시켰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의 대변자로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공표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이며, '절대적 실재, 즉 초현실' 속에서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적인 이성의 세계와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또한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천재성은 일반적으로 미개발된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규정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피에르 르베르디 등의 는 전과정에 걸쳐 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즉 무의식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 생경한 단어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전 시대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조르조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등 동시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인간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25년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역사는 제명과 탈퇴, 인신공격 등으로 얼룩졌다.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르네 마그리트,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호안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들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여 초현실주의적 양식으로 범주화해서 요약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자 나름대로 자기탐구의 수단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려는 1가지 목표만을 추구했다. 한편 미로를 비롯한 화가들은 지고미(至高美)를 형식적 수단으로 해서 개인의 환상, 무의식과 의식을 탐구했다. 이 두 극단은 그 발전가능성의 영역면에서 구별된다. 장 아르프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한쪽 극단은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불확정적인 생물형태적인 이미지를 창조한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의식적인 연상작용을 일으켜 그 끝없는 탐구과정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에른스트·마송·미로 등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유기적·상징적·절대적 초현실주의라고도 했다. 이와 반대되는 극단에서는 명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나 비합리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인식 가능한 이미지는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모호하고 역설적이며 충격적인 구조로 재구성된다. 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논리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이성적인 선천적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에 대한 공감을 유발시킨다. 르네 마그리트는 햄 한 조각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는 보통 테이블 하나만 그리는 등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는 표현을 하여 그러한 접근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등도 이와 유사하지만 좀더 복잡한 형상으로, 현실세계에 꿈처럼 기이한 장면을 결합시켜 표현했다.

그들은 심리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몇 가지 특수한 기법을 고안했다. 나무 등 요철이 있는 재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캔버스를 긁어 자국을 만드는 그라타주 등은 에른스트가 개발한 것으로 그 불완전한 이미지가 보는 이의 마음속 에서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의 무의식으로부터 분출하는 혼돈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술적 소묘(→ 자동기술법 ), 일상 생활에서 취한 오브제 등도 주요기법에 속한다. 초현실주의는 내용적 측면과 자유로운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당시 입체파 미술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는 회화적 전통을 현대 미술에 이어준 공로가 크다. 특히 유기적 초현실주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비재현적인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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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신체, 정체, 시선의 담론을 제기한 최초의 해프닝

1960 년대 말은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실험미술이 등장한 한국 실험미술의 맹아기였다. 해방 후 제도적 교육을 받은 젊은 작가들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경향들은 우선 과거에 비해 다양한 서구의 실험미술의 정보 유입에 기인한다. 당시 서구의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나 일본의 구타이, 네오다다이즘 활동 등 전위예술들에 대한 정보가 유입되어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 의욕을 자극하였다. 다른 한편으론 급격한 경제성장에서 파생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젊은 작가들의 기성제도나 권위에 대한 태도들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은 전 세계적으로 반전운동, 인종문제, 환경운동, 히피, 여성운동, 68학생 운동 등 사회적 격변기였다. 1960년대 앙포르멜이 주류적 흐름으로 편입되어 실험정신을 상실하고 제도화 되어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젊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실험적 경향은 과거 매체중심적 작업들에 비해 그 폭과 관심영역이 크게 확장된 것이었다. 특히 회화나 조각이라는 전통적 영역으로 정의할 수 없는 오브제의 사용과 자신의 신체를 통한 해프닝의 출현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작업의 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의 조형적 차원의 문제들로부터 사회와 현실을 직접적으로 호흡하는 차원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젊은 그룹 활동들로는 기하학적 평면작업을 시도했던 '오라진' 그룹과 다양한 오브제 작업을 펼쳤던 '무동인(無同人)' 그리고 다양한 현대적 매체와 비물질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사회적 발언을 꾀한 '신전(新展)'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보듯 탈(脫)아포르멜적 경향을 가지는 것으로 당시의 실험적 경향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험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문화적 미성숙과 몰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에서의 실험미술에 대한 경직성과 거부감이 매우 심한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이상하거나 불온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로 인해 그것은 수용의 한계가 있어 이러한 움직임이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는 없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포스트모던 계열의 다양한 실험적 작업들의 모태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세 단체 중 행위예술적 성향을 가지며 상대적으로 사회적 발언이 강했던 '신전'의 경우 강국진, 정찬승,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들의「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은 회원작가들이 비닐우산 주위를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돌다가 우산에 촛불을 꽂는 행위인데, 핵우산을 상징하는 비닐우산과 순수한 인간정신을 상징하는 촛불 행위를 통해 문명의 명암을 대비 결함시키며 사회개혁적 의미를 승화시키고자 하는 매우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신전' 동인 중 정강자는「키스미」,「살인자」등을 통해 미술계와 사회부조리 전반으로부터 탈출하여 여성해방을 갈망하는 의지를 담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적 해프닝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투명풍선과 누드」(1968)는 이러한 의지를 담고 있다. 한 시간 반 동안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서 지속된 이 해프닝은 작가자신의 누드에 회원작가들과 관객들이 투명풍선을 불어 부착하도록 하였다. 재즈 음악과 현란한 무대조명이 어우러졌고, 마지막으로 참여자들이 누드에 부착된 풍선들을 터뜨린 뒤 작가의 퇴장으로 끝나게 된 이 해프닝은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제기하면서 가부장적 사고가 편만해 있던 당시의 사회 문화적 환경을 향하여 여성해방적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로선 여성의 누드를 작품의 문맥 속에 행위예술로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녀의「투명선과 누드」는 예술 영역의 확대는 물론, 투명풍선의 신비로움, 누드에 대한 성적 호기심 등을 절묘하게 결합한 형식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경직성과 허구적 시각을 일깨우는 동시에, 젠더(gender)로서 여성의 문제와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해프닝으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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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이즘 [Dadaism]예술운동 | 브리태니커

20세기 초반 주로 취리히와 뉴욕·베를린·쾰른·파리 및 독일의 하노버 등지에서 활발했던 허무주의적 예술운동.

이 운동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이 '다다'(또는 다다이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설에 따르면, 1916년 취리히에 후고 발이 운영하는 볼테르 카바레(카페)에서 장 아르프, 리하르트 휠젠베크, 트리스탄 차라, 마르셀 장코, 에미 헤닝스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와 반전주의자(反戰主義者)들이 모임을 가지곤 했는데 한번은 프랑스어-독일어 사전에 끼워져 있던 종이 자르는 칼이 우연히 '다다'라는 단어를 가리키고 있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단어가 정통주의 미학에 반기를 든 자신들의 예술활동과 반전운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채택했다고 한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을 혐오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절망하여 이같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후에 다다이즘 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이 예술경향의 선구자였으며 마침내 대표적인 다다이즘 작가가 된 인물로 마르셀 뒤샹이 있다. 그는 1913년에 최초로 기성자료를 이용한 작품인 자전거 안장에 바퀴를 올려놓은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뉴욕 화랑 '291'과 월터 아렌스버그의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다다이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이 두 사람은 다 부유한 예술 후원자였다. 미국의 다다이즘 운동은 취리히의 다다이즘 운동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생겨났지만 비슷한 성격을 지녔으며, 맨 레이와 모턴 샴버그 및 프랜시스 피카비아 같은 예술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은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블라인드 맨〉·〈롱롱 Rongwrong〉·〈뉴욕 다다〉 같은 정기간행물을 통하여 당시의 미학적 규범을 타파하려 했다. 피카비아는 미국과 유럽을 왕래하면서 뉴욕·취리히·파리에 있는 다다이즘 예술집단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는 1917~24년에 바르셀로나·뉴욕·취리히·파리에서 다다이즘 잡지 〈291〉을 발행했다.

취리히 다다이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휠젠베크는 1917년 이 운동을 베를린에 소개했는데, 그곳에서는 다다이즘 운동이 좀더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독일 예술가로는 라울 하우스만, 한나 회흐, 게오르게 그로스, 요하네스 바더, 휠젠베크, 오토 슈말하우젠, 빌란트 헤르츠펠데와 동생 존 하트필드(정식 이름은 헬무트 헤르츠펠데인데 독일 국수주의에 항의하여 영어식으로 이름을 바꿈)가 있다. 이 예술가들이 주로 썼던 표현수단은 풀로 붙인 사진 조각에 글자로 된 메시지를 덧붙이는 사진 몽타주 기법이었다. 존 하트필드는 특히 후기의 반나치 작품들(예를 들어 〈카이저 아돌프〉)에서 이 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썼다. 뉴욕·취리히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를린의 다다이즘 예술가들도 공개 모임을 주최하고 기괴한 광대짓으로 청중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들도 역시 〈다다 클럽〉·〈데르 다다〉·〈사람마다 자기 축구공을 Jedermann sein eigner Fussball〉·〈다다 알마나흐〉 등과 같은 간행물을 발간했다. 제1회 국제 다다 박람회는 1920년 6월 베를린에서 열렸다.

다다이즘 활동은 독일의 다른 도시에도 번져갔다. 1919년과 1920년 쾰른에서 이 활동에 참여한 주요인물은 막스 에른스트와 요하네스 바르겔트였다. 하노버의 쿠르트 슈비터스도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했는데, 그는 자신의 콜라주와 구조물 및 문학작품을 메르츠(Merz)라고 이름붙였다. 슈비터스는 예술작품을 창조할 때 다다이즘적인 소재(하찮은 잡동사니들)를 사용했지만, 다다이즘의 반예술적 특징과는 달리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학적 효과를 거두었다. 파리의 다다이즘 운동은 창시자의 한 사람인 시인 트리스탄 차라의 영향을 받아 미술보다는 문학에 역점을 두었다. 다다이즘 계열의 무수한 소책자와 평론지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리테라튀르 Littérature〉(1919~24)였다. 이 잡지에는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리프 수포, 폴 엘뤼아르, 조르주 리브몽 데세녜의 글이 실렸다. 그러나 1922년부터 다다이즘 운동은 시들기 시작했고, 참여자들은 초현실주의 로 그 방향을 바꾸었다.

다다이즘은 20세기 예술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허무주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사회비판과 예술의 형식상의 모든 인습을 무차별 공격하는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후계자는 없었지만, 기괴하고 불합리하고 환상적인 것에 몰두하는 태도는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열매를 맺었다. 우발적이고 우연한 성질을 띤 다다이즘 예술가들의 창조기법은 나중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적 표현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개념예술도 역시 다다이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술가의 정신활동('지적 표현')이 창조된 물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맨처음 주장한 사람은 바로 마르셀 뒤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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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예술 [fine art, 純粹藝術]예술 | 브리태니커

비실용적인 시각예술 또는 주로 미의 창조에 관련된 예술.

일반적으로 회화·조각·건축을 포함하며 때로 시·음악·무용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엄밀한 의미의 순수예술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벽화·도예·직조·금속세공·가구제조 등과 같은 장식예술과 공예와 구별되기도 한다(건축가는 이 점에서 건설업자와 구별됨). 대중예술·원시예술, 그리고 중세말까지의 예술은 순수한 미적 향수 이외의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예술가와 기능인의 구별은 르네상스 이전에는 거의 없었으며 순수예술(프랑스어로 beaux-arts)이란 명칭도 18세기 중엽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다. 당시 독자적인 아카데미들의 설립으로 조형예술이 부차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보다 고상한 창조물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러나 순수예술과 응용예술에 대한 엄격한 구별은 19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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