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우라

사진에서 현대 이미지로 출현하는 과거 사실에 대하여 응시자가 가지는 비현실적인 감정을 말한다. 1930년대 발터 밴야민(Walter Benjamin)에 의해 최초로 언급된 이러한 비이성적인 감정은 사진 이미지에 응시자 자신의 의식이 투영되어 출현하는 극히 주관적인 감성의 음색이다. 결국 아우라는 밴야민 이후 앙드레 바쟁의 자동생성과 바르트의 푼크툼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존재론적 무엇(생성)이다.

2. 자동생성

1940년대 영화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언급한 말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사진 이미지를 지칭한다. 바쟁은 사진 이미지는 경헌적 세계에 내재된 생성을 누설한 것이며 이때 생성의 출현은 자동이라고 한다. 자동생성은 1930년대 벤애민의 아우라와 1980년 바르트의 푼크툼을 이어주는 중요한 개념적 가교로 간주 된다.

3. 푼크툼

사진 이미지와 관계 사이에 발생하는 일종의 메타 감정으로 바르트가 언급한 가장 대표적인 사진적 공리이다. 특별한 관객의 주체적 관점에서만 포착되는 이 개념은 대상으로 부터 문화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형성된 앎의 체제(스투디움) 밖에서 나타나는 이상하고 특이한 돌출 감정을 말한다. 이는 또한 역사적으로 아우라와 자동생성 개념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4. 스투디움

사진 이미지에서 문화적으로 형성된 앎의 총체 혹은 그러한 개념을 지칭 한다. 이러한 개념은 예견치 못한 돌발적 감정 즉 푼크툼과 대비 된다.

5. 노에마(Noeme)

현상학에서 사유의 의도적 대상 즉 의식이 지향하는 대상적 측면을 말한다.

바르트는 "그림은 보지 않고도 실제성을 꾸며낼수 있다. 그러나 사진에서는 사물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결코 부정 할수 없다. 거기에는 중첩되는 이중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실제성과 과거' 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속력은 유일하게 사진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요약해 본질자체 즉 사진의 노에마로 간주해야 할것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노에마의 이름은 '존재했던 것' 일 것이다."

6. 내시(공시)

언어에 있어서 명시적 의미와는 달리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암시적 의미를 말한다. 사진에서 내시는 사진이 재현하는 이미지(외시) 이면에 사회적 문화적으로 내포된 다양한 메시지를 함축한다. 1961년 첫 잡지 기사 '사진적 메시지'에서 바르트는 트릭, 포즈, 대상, 포토제닉, 미학, 통사법의 여섯개로 내시를 구문 했다.

7. 코드작용

어떤 특징의 전달을 위해 메시지와 자료들에 하나의 코드를 작용 시키는 모든 변형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코드 행위에는 문화적 특징을 가지는 외적 코드작용과 경험적 현실에서 내부적으로 적용되는 내(재)적 코드작용이 있다.

8. 코드화

문화적으로 암시되는 외적 코드작용을 말한다. 다시말해 어떤 특정한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메시지와 자료들을 합법적이고 규칙적인 규정을 가지는 문화적 코드로 통합 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9. 탈코드

탈코드라고 번역된 이용어는 주로 코드 없는 메시지(Message sans code)와 함께 쓰이는 술어 용어 이다. '코드 없음' 또는 '코드 없이' 라는 것은 한 시대 한 사회 내에서 문화적 소통 양식에 관계없이 새로운 양식으로 생성되는 어떤 실재성의 의(재)화를 의미한다. 코드 없는 메시지는 기존 소통양식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배제 되었거나 소외되었던 실재가 현실로 전면에 등장하는 어떤 한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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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가에 지은 집이라지만, 응접실에서 보면 앞으로 두동의 아파트가 있어서 그사이로 한강이 보이는 12층에 둥지를 틀었다. 요즘 강가에 아파트는 강과 정면으로 마주보면 맨 앞동외엔 강이 보지지 않기 때문에 서로 엇비슷하게 세워서 모든 동에서 강이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어느 동에 살든지 한강이 보이도록 되어 있다.

강가에 강변 북로를 달리는 차들 넘어 고수부지가 있고 조그만 주차장이 자리하고, 자전거들이 싱씽 달리며, 산책하는 시민들, 그리고 한강이 어제 처럼 유유히 흐른다.

집에서 걸어서 강으로 갈수 있어서 한강을 산책하기엔 너무 편하게 되어 있다. 8년전엔가 이곳에서 한 2년 살았지만 지금은 다른 동이다.

이삿짐이와서 정리하고 수리하고 세로 필요한것들 사다 놓고, 이곳 저곳에서 화분이며 꽃나무들 얻어더가 꽤 많은 식물들도 들여 놓았다. 다시 미국 들어 갈때는 가지고 갈수 없기 때문에 될수록 사지 않고 집집마다 버리는 것들 주어 모아,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멋진 화원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둘자리가 없어서 그만 얻는것도 사양헤야 할 정도가 되었다. 생명이 사는 집은 활기가 있고 맑은 공기와 따사로운 빛이 함께해야 그안의 생명들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수 있는 것이다. 다행이 동남으로 창이 있어 볓이 꾀 들어온다.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는 빛을 흠뻑 받아 시들하던 나무들도 생기를 되찾은듯 보인다.

 

 

 

 

 

 

6과목의 강의를 들으러 동분서주 하다보니 너무 지쳐서  과로가 겹치는 일이 벌어 졌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불러 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겨울부터는 3과목으로 줄여야 겠다. 미술 사진 기타 이렇게 해야 겠다.

지난주엔 친구와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러 갔다. 이촌동에서 구리시민공원까지, 그런데 갈때는 못느꼈는데 올때는 너무 힘들어 쉬엄쉬엄 오다가 반포에서 부턴 걸을수 밖에 없었다. 후유중이 일주일은 가는거 갔다.  천호대교에서 부터 팔당까지 강변 도로가 예전에는 없던 길이 생겨서 더욱 좋아진듯 하다.  그러나 미세먼지 때문에 자전거 타는 분들은 전부 갱처럼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서 잘생긴 얼굴들을 알아 볼수가 없는게 아쉽긴 하다. 한반도에 고기압이 자리하고 바람이 없는 날이면 황사까지 더해서 미세먼지가 살인 수준이라니 이곳에서 사는 생명들이 걱정이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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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하나의 예술로서 열렬히 옹호했으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람회를 통하여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1902년 그 당시의 전통적인 사진술에 반대하는 독창적 단체인 사진분리파(Photo-Secession Group)를 결성했다. 스티글리츠의 걸작 사진들은 부인 조지아 오키프를 찍은 400점에 달하는 일련의 작품과 감정을 시사하는 구름 형태에 관한 연구이다. 사업을 그만둔 모직상인 에드워드 스티글리츠의 큰아들로 뉴욕에서 초기 교육을 마친 뒤, 자녀들의 상급학교 교육을 염려한 부모를 따라 1881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1883년 스티글리츠는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 종합기술학교에 등록했으나 몇 달 뒤 작은 사진기를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계공학을 포기하고 사진화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베를린에서의 학창시절에 그가 사귄 친구 중에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사진을 회화와 버금가는 창조적인 예술의 매개체로 인식시키기 위해 힘쓰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인정을 얻는 최상의 방법은 사진의 권위자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사진에 가장 높은 기준을 설정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상과 메달을 획득해야 된다고 단순하게 믿었다.

189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만든 그의 초기 작품들(1883경~1910)은 이같은 목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당시 실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꾸준한 기술적 혁신이었다. 예를 들면 19세기말 그는 눈·비가 내릴 때 또는 저녁 때 처음으로 성공적인 사진을 만들었고,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사진기의 사용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도했다. 1910년까지 이 사진들은 많은 중요한 상들을 받았다.

자신의 초기 명성만으로는 사진을 예술로서 인정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 개인의 활동보다는 집단활동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사진조직에서 주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통합하여 여러 차례 모험을 시도한 뒤 1902년 사진분리파라는 자신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했다. 이 명칭은 당시에 전통적인 예술세계에 저항하고 있던 독일의 분리주의파(Secessionist) 화가들에서 따온 것이며, 스티글리츠는 단체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상에 헌신한 재능 있는 미국 사진작가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1905년까지 사진분리파에게는 그들의 작품을 전시할 장소가 없었다.

1905년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적극적인 권유로 스티글리츠는 이 단체가 자체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뉴욕 시에 자리잡은 이 화랑은 처음에는 '사진분리파의 작은 화랑'(Little Galleries of the Photo-Secession)이라고 불렸으나 곧 화랑이 위치한 거리의 번지수 '291'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스티글리츠는 자신을 화랑과 거의 동일시하여 때때로 자신의 개인적인 서신에 '291'이라고 서명했다.

이 단체를 설립한 뒤, 스티글리츠는 현대미술운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현대적 동향을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매력적인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913년의 유명한 아모리 전시회는 종종 미국에 현대미술을 소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1908년에 이미 스티글리츠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했고, 계속하여 아모리 전시회 이전 5년 동안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앙리 루소,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전을 개최했다.

더더욱 혁신적인 것은 생존해 있는 미국 예술가들도 똑같이 중요하며,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중요한 예술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스티글리츠의 열렬한 신념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현대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동일한 기간에 미국 화가 존 마린, 마스던 하틀리, 아서 도브, 앨프레드 모러, 막스 웨버의 작품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17년 '291'이 문을 닫기까지 그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엘리 나들먼, 그리고 화가 프랑수아 피카비아, 지노 세베리니, 스텐턴 맥도널드 라이트, 1924년 그의 아내가 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미국인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전시회는 적의와 조소적인 대중들이 관람했다. 그 격렬했던 세월의 역사는 스티글리츠가 편집·발행한 급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잡지 〈카메라 워크 Camera Work〉(1903~17)에 기록되어 있다. '291'과 〈카메라 워크〉는 둘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1917년 막을 내렸다. 화랑이 문을 닫게 되자 스티글리츠는 '291'에 관여하는 동안에 소홀히 했던 자신의 사진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의 관심은 젊은시절의 기술적인 면과 광범위한 주제에 열중했던 것으로부터 그의 여름휴양지였던 조지 호숫가나 뉴욕 시내의 집에서 날마다 생활하면서 보는 대상에 대한 밀도 깊은 작업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1917~37)에 진행된 2가지 작업은 각각 400점 이상의 사진들로 구성된 일련의 연재물인데, 이것은 흔히 그의 가장 뛰어난 사진들로 여겨진다.

이 일련의 연재물은 조지아 오키프의 초상화와, 모든 가능한 감정적 경험과 대응할 수 있는 구름의 추상형태에 대한 사진들이다. 그는 이 2가지 일련의 작품들에서 계속 사진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그는 사진에 대해 열중해 있으면서도 미국 화가들의 전시회를 계속 열었는데 그들이 생계를 마련하면서 하고 싶어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때 조소의 대상이었던 유럽 예술가들이 당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이후로는 그들을 위한 일은 그만두었다(그는 장사꾼이 아니였으며, 예술가들을 위한 활동으로 결코 재정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음). 사망할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의미 있는 예술이 미국에 존재한다고 믿었고, 미국의 예술가들(주로 찰스 데무스, 도브, 하틀리, 마린, 오키프)이 이러한 희망을 성취하도록 장려하는 데 늘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념은 '291'(1905~17), '친밀한 화랑'(Intimate Gallery : 1925~29), '미국의 공간'(American Place : 1929~46) 등 3개의 화랑에서 열린 175회 이상의 전시회에서 나타났다(1905~46). 그는 죽기 전에 미국의 미술이 진실로 독자적인 지위와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풍토를 바꾸어놓았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미술관이 지닌 사진에 대한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의 사진들은 보스턴·뉴욕·워싱턴의 주요미술관에 예술작품으로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최초의 작품들이었다. 이들 미술관에서 그의 사진들은 평면적인 시각예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걸려 전시되었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이며 정확한 안목과 융통성 있고 탐구심이 풍부한 마음과 혁신적인 신념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도전적 기질을 지녔다. 거의 혼자서 사진뿐만 아니라 회화와 조각 분야에까지 자신의 조국을 20세기의 예술세계로 진입하게 했으며 처음으로 전시회를 통하여 대중을 가장 현대적인 예술에 눈뜨도록 일깨웠다.

자신의 화랑에서 사진기와 펜, 그리고 격렬한 열변으로써 19세기 이래 주로 유럽 학자들을 모방하는 데 한정되어 있던 자기만족적인 예술전통을 멀리하도록 미국인들을 지도했으며, 당대의 미국 예술가들을 국제 예술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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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호텔에 박힌지 한달이다. 버지니아에서의 호텔까지 치면 40일이 된다.

그래, 이건 박힌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냥 박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건 사실이다.

그동안 건강의 변화는, 식중독으로 한번 고생했고 혈압이 140을 맴도는 현상이 생겼다.

지금까지 한번도 혈압이 이런 수치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분명 문제가 일어 나고 있는것 같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야채 샐러드를 먹기 시작 했다. 그리고 운동을 꾸준하게 하기 시직 했다.

운동 전에는 137을 가리킨것이 운동후에는 110정도로 떨어 지는걸 눈으로 확인되니 운동을 안할수 없게 만든다. 고기를 줄이고 채식을 될수록 먹기로 했다. 내장비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여섯군데 강의에 등록을 했다.

사진, 미술, 포토샵을 등록 했고 분재와 기타 그리고 드럼을 등록 했다.

조금 무리한 스케줄이지만 그렇게 하는게 생활의 활력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다.

영어회화도 하고 싶었지만 일정이 중복되어 다음 기회로 미루는 대신 독학으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식투자를 시작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건 아파트로 이사한 뒤에 실시할 예정이지만 옛날의 감각을 익히기에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본다.


오늘 아침은 부연 연무가 남산을 가리고 있다.

그래도 아래로 보이는 반포와 잠원동의 아파트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웃고 있다.

그사이로 신세계백화점과 메리앗호텔 사이 빌딩 공사장의 크레인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오르락 거리며 아침을 깨우고 있다.





깨어있는 호텔의 하루가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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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약속된 3년이 시작 되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한국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내 인생사 내일을 모르는 삶이지만, 오늘을 직시하고 살아가면 행복은 자연 함께 하리라.



어제 태풍이 동해안을 스치고 지나간뒤 서울 아침은 멀리 수락산까지 선명하게 보이는게 산뜻하게 다가 온다. 이곳은 강남고속버스 터미날과 근접한 메리츠 호텔 26층이다. 앞으로 반포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넘어에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이 조용하게 흐르고 있다. 그뒤로 서울의 명산 남산과 서울타워가 하늘을 뚤고 위용을 자랑한다. 인왕산이 보이고 옆으로 북한산, 그옆에 수락산, 그리고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 산이 서울을 감싸고 있다. 이렇게 산천은 변함 없는데, 그속에 사는 생명들은 나고 지고 항상 변하고있다. 몇일전에 이북에서 포를 쏘아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더니 서로 실리를 찾아 조용히 마무리 된듯 하다. 한반도는 항상 요동을 쳐야 생명들이 숨쉬며 살수 있는 곳인가 보다.

고층빌딩에 살다보니 때로는 부옇게 흐린 아침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해맑은 새벽이 눈을 뜨기도 한다. 자동차의 불빛이 곡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밤을 그리기도 하고, 공사장의 크레인이 창문에 얼신거려 공상을 흐트려 놓기도 한다.

이렇게 현시되는 모든 상황이 지금의 삶을 만들어 간다. 

나는 이렇게 일어나는 또는 이르키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일련의 시나리오를 지켜보면된다. 그래서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고 순응하고 간직하며 삶에 대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다. 따사로운 아침빛에 감사하고, 강열한 오후 햇빛에 행복을 느끼며, 부슬거리는 이슬비에 나른한 감미로움을 안으면서 그렇게 살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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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Sun Room이 있다. 2층에 자리한 이곳이 우리의 생활 공간이고 우리집 명물이다.

한가지 흠이라면 3면의 유리창이 전부 프라스틱으로 되어 있어 방열이 안된다. 따라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엄청 춥다. HVAC도 설치되지 않아 더하는것 같다. 3년을 벼르다 올엔 이른 봄부터 큰맘 먹고 유리창을 발열유리로 교체하기로 하고 3월초에 주문을 했다. 그러면서 썬룸 밑에 빈 공간으로 있는 아래층을 그린룸으로(온실) 개조하기로 했다. 그린룸은 삼면벽을 유리창을 달고 내부벽을 Dry wall로 수리하면 멋진 온실로 쓸수 있겠지 싶었다. 3월 중순 아래층 그린룸부터 공시를 시작 했고 유리를 부착하면 다음 작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유리창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리는 유리창은 가져오지 않고 무려 4달에 걸쳐 유리창 넣을곳을 다섯번을 재가기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아내가 수많은 메세지를 보냈고 통화도 했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공사는 하지 않고 잊을만 하면 와서 창을 재가기를 5번을 한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이런 비지니스로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는지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아무튼 우여 곡절 끝에 7월9일 창을 설치해 주었다. 4개월이 결려서 말이다. 그동안 나는 창앞에 있는 갈대(이름을 모르는데 갈대 처럼 생겼다)다섯 그루를 파서 집좌측 입구에 나란히 옮겨 심었다. 그자리엔 잔디씨를 뿌려서 잔디밭으로 만들어 놓으니 시계가 훤하게 트이는게 보기 좋았다. 

미국의 집은 대부분이 나무를 이용하여 집을 짖는다. 그래서 한국의 아파트 처럼 훈훈하지가 않다. 그래선지 내게는 뭔가 모자란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집짖는 일을 우습게 생각 하였다. 나무만 사다가 뚝딱하면 집이 되는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린룸 공사하는것을 보니 보통 까다롭고 복잡한게 아니었다. 구조를 만드는데는 별탈 없이 잘이루어 지지만 특히 끝 마무리를 하는데 온신경을 써서 작업하는 것이 심비롭기 까지 하다. 그렇게 공을 들여 만들어 놓으니 과연 보기 좋다.




우여곡절 끝에 근 4개월에 걸처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무엇보다 썬룸의 경관이 탁 트인게 너무 맘에 든다.

그러나 인간사가 늘 그렇듯이 애써 만든 그린룸은 3년후에나 사용할수 있으니 이또한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세입자가 3년간 잘 사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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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0일 2박3일 여정으로 Kiptopeke state park Camp Graund에 와이프와 둘이 캠핑에 나섰다.

95번 도로가 곳곳에서 정체가 있었지만 괜찮은 편이었으나 노폭쪽에서는 심한 정체로 1시간 가량 지연되었다.

오후 4시쯤 도착하여 텐트를 설치하고 테클샵에 들러 산물고기(민이라 하는데)와 닭목을 사서 해질녁에 피어로 낚시를 나섰다. 광어를 노리고 던진 미끼는 게들 차지가 되고 낚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낚시대를 접어두고 아내와 함께 게 사냥에 나섰다. 둥그런 그물 가운데 닭목을 단단히 묵어서 바다에 던져놓고 한쪽 끝을 묶어 놓으면 된다. 2~3분마다 건져 올려 보면 2~3마리의 게가 닭목을 뜯고 있다가 그데로 끌려 나온다. 통속에 털어 놓고 다시 던져 놓길 반복하면 된다. 2시간 가량 작업을 해서 2부쉘 정도의 게를 포획 했다.

저녁 11시쯤 내일 게만을 꿈을 꾸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인지 어디서 천국에서나 들을수 있을 법한 새소리가 들려 온다. 꿈이려니 하다가 잠이 께는 내 마음ㅇ레 청량하고 상쾌함이 가득 밀려든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데 정말 천국의 소리임에 틀림 없다. 온같 새소리가 끼르륵 쪽쪽 울리는데 자연히 환희에 들뜬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잠자는 아내를 가만히 불러서 저소리를 들어 보라고 하구선 둘이 숨죽여 천상의 찬가에 흠뻑 졌어 들었다.

내생에 이렇게 아름다운 환상곡을 들을수 있는 행운이 있을줄은 생각지 못했다. 눈을 뜨고 않아 감상하고 있으니게 생각이 떠올랐다. 된장을 풀어 삶아 놓으니 그맛이 셋이 먹다 한이 죽어도 모를 맛이다. 둘이라서 다행이다.

다른 낚시터를 찻아 보려고 5마일 떨어진 Cape Charels라는 조그만 마을의 피어에 가보았다. 한인들 4명이 낚시를 하고 있는데 피어 옆으로 1마일 정도 길게 쌓아둔 돌담 방파제를 걸어 끝에 가면 광어가 우글데는 포인트라 한다. 자기들은 아침 일찍 도착하여 그곳에 나갔다가 소나기가 와서 잠시 들어 왔는데 다시 나가겠단다. 보니 돌을 아무렇게나 쌓아 둔곳이 여간 위험한 곳이 아니다. 거기다 물이 들면 잠기는 곳이라서 잠기기 전에 나와야 한단다.  내가 가기엔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내를 졸라 낚시배를 알아보니 오후 1시에 출발하는 배가 있단다. 현제 1명만 사인 했는데 보통 사인 안하고 많이들 오시니 12:30분 까지 오면 탈수 있단닫. 배를 4시간 정도 탄다고 해서 용기를 내고 아내를 제촉하여 한시간 전에 멀미앾을 둘이 한알씩 먹고 낚시배를 타러 갔다. 가보니 아침에 출발했던 사람들이 도착하여 하선하고 있었다. 조황을 살펴 보니 씨알 적은 크록커만 열뎃마리씩 잡아 온거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없어 배가 출항하지 않는 단다. 실망만 안고 괜히 멀미 약만 먹은 꼴이라니...

오후에 남수진씨 부부가 도착 했다. 두분에게 게잡는법을 전수하고 졸음에 쫏겨 자리에 눞고 말았다. 아침에 생각하니 멀미약 때문에 잠이 그렇게 쏟아 찐거 같았다. 덕분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잤지만 수진씨 부부에게 미안함은 감수해야 했다. 

두분이서 밤 1시까지 작업하여 3부쉘의 게를 잡아 왔고 생에 이런 대풍은 처음이라며 아직도 들떠 있음을 보고야 겨우 미안했던 마음이 다소 놓였다.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텐트를 철거하고 좋은 볓에 말려서 잘 정돈하고 집을 향했다.

오는데는 교통도 좋은 편이어서 천국의 찬가를 간직한체 행복을 안고 귀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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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 7박 8일을 플로리다 Carrabelle(2654 Highway 98E Carrabelle FL 32322)로 승규네 형제들 모임에 따라 나섰다.

낚시의 천국이라는 기대로 미국에서의 낚시맛을 보겠다는 기대로 출발하였지만 결과는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숙박지의 바다 지형이 5마일 전도 앞에 St George Island이 길게 동서로 자리하고 있어서 앞바다의 수심이 2미터가 체 안되는데다가 썰물때는 바닥이 드러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첫날은 내려가는 길에 Gorgia주의 Savannah의 호텔에서 투숙했다. 사바나시는 옛날 노예선이 입항한 곳으로 노예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라고 하는데 실제 느낌은 그렇지 않은것 같았다. 커다란 화물선이 바로 들어오는 꽤 큰 항구 도시이고 옛건물들이 그데로 보존되어 고풍스러운 항구였다. 그러나 식당의 음식맛은 썩 좋지는 않았다.






 

 둘째날 오후 일찍 도착하여 집앞 Pier에서 낚시를 했는데 수심이 낮고 수초가 무성하여 새끼고기들이 우글거려 낮에는 낚시가 불가 하였고 밤에는 메기가 득실데는 곳이었다. 둘째날 낚시터를 찻아 St George섬으로 이동하여 Park의 해변에서 펼쳤으나 모래사장에서의 낚시라서 파도 때문에 입질을 감별하기가 쉽지 않았고 상어새끼와 Trout(민어) 사이즈 미달(14') 2마리하고 철수 하였다. 오는길에 East Point에서 생조지섬으로 연결되는 구다리가 양쪽으로 1마일 가량이 남아 있어서 그곳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도 입구쪽 다리로 가서 던져 보았는데 씨알 적은 크록커와 메기가 주종 이었다.그래도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데 이곳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서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였다.


 셋째날 와이프와 둘이 어제의 생조지섬의 입구쪽 다리를 끝까지 가서 낚시대를 펼쳤다. 족히 1마일을 걸어서 장비 끌고 가는 길이 왜 그리 먼지...  그런데 문제는 넣자마자 30'급 메기가 물고 늘어 지는데 더운 날씨에 줄줄 흐르는 땀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중엔 이놈들이 두마리씩 올라오니 원줄만 3번 터져 먹고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어제 했던 입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세상에 고기가 큰놈이 너무 많아서 철수 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쪽은 그런데로 씨알은 적지만 크록커도 올라오고 해서 괜찮았지만 흥을 읽고 말았다. 메릴랜드에도 이것 보다 씨알 굵은 크록커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더위만 먹고 철수 했다.


 넷째날은 나의 제안으로 동쪽의 Bald point state park 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곳 동쪽편에 조그만 Pier가 있어서 기대를 가지고 시작 하였지만 가오리만 서너마리 하고 썰물이 되니 앞 바다가 온통 자갈돌이 드러나는 둔덕들이 나타났다. 이곳 역시 수심이 이렇게 낮으니 고기다운 것은 기대 하기 힘들었다. 상류쪽으로 올라가 모래사장에서광어를 노려 보았으나 메기만 보고 철수 하였다. 오는길에 Alligator Dr를 따라 우측으로 나와 있는 기다란 섬으로 가보기로 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좌우로 집들만 주욱 있고 끝은 차가 들어 갈수 없도록 막혀 있었다. 다시 돌려 나오는데 서너명이 길가 에서 낚시하는 모습이 보여서 우리도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시도해 보았지만 메기만 낚일 뿐이었다. 철수해서 오는데 동서가 낚시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보더니 우릴 부르는 것이었다. 가보니 20'는 되어 보이는 Black Drum을 4마리 잡아 놓았다. 바다를 보니 앞쪽200미터 지점에 모래 언덕이 길게 막고 있으며 그곳에서 너울이 일렁이고 있었다. 언듯 보아도 포인트임이 틀림 없었다. 저녁먹으러 가야 한다는 동서와 그동생을 먼저 가라하고 혼자 남아 그들 옆에서 낚시대를 평쳤다. 그들은 Live Shrimp을 미끼로 쓰고 있었지만 나야 죽은 새우 밖에 없으니 어쩌랴. 새우를 반으로 나누어 끼우고 던졌다. 역시 메기를 서너마리 잡고 실망과 기대로 기다리는데 입질이 다른 감이 왔다. 제때 젭칠을 하니 모처럼 툭 터지는 손맛이 제대로  한마리 걸었다. 역시 블랙드럼이 27인치 짜리다. 옆에 미국인들이 더 좋아하며 찬사를 보낸다. 어두워 지면서 밥먹으러 갔던 두분이 와서 함께 했지만 메기 등살에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일을 기약하며 철수 했다.


 다섯째날 동서 승규와 둘이 아침부터 어제의 블랙드럼 포인트로 향했다. 산새우를 구입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펼쳤다. 어제 까지만 해도 그흔하던 메기 한마리 입질을 안한다. 점심때가 넘고 5시가 넘어도 입질 한번 없다. 쨍쨍 내리쬐는 땡볕에 왼종일 그을리고 땀흘리며 기다리는데 한계를 느껴야 했다. 승규는 포기하고 가기를 제촉 했지만 내 느낌으로는 어제의 물때까지는 기다려야 할것 같았다. 승규를 보내고 혼자 기다리기 한시간쯤, 드디어 입질이 왔다. 실수없는 챔질에 텅하고 전해오는 감촉이 그놈 이었다. 30분뒤 다시 한마리. 날이 어두워 지자 다시 메기의 공격이 시작 되었다. 내일은 오후 6시에 오기로 마음먹고 철수 했다.


 여섯째날 전날 저녁에 블랙드럼을 안주로 먹은 소주 때문인지 아니면 하루종일 땡볕에서 고생한 때문인지 머리가 띵한게 컨디션이 엉망이다. 8명의 장정이 배낚시를 가기로 해서 떠나고, 나는 배멀미 탓에 와이프와 둘이 낮엔 생 조지섬의 공원 해변에서 쉬기로 하고 가다가 East point에서 곧장 가는 긴다리를 넘어 Apalachicola의 Old town에서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이곳 손님들은 대부분 나이많은 관광객들이 많았다. 식사후 해변에서 모처럼 수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햄버거 하나로 저녁을 때우고 혼자 블랙드럼 포인트로 향했다. 이게 왠일인가? 딱 3분만에 입질이 강하게 온다. 제빠른 챔질에 팅하는 피아노 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전해온다. 이로부터 계속 4수를 빈손없이 올리고 승규를 오라고 전화했다. 그리고 다시 3수 아이스 박스가 가득한 맘큼 마음도 가득하다. 더 무엇을 바라 겠는가. 철수하여 집에 오니 배타고 나간 팀들이 붉은돔 23'쯤을 4수 해왔다. 그런데 회맛이 썩 좋은편은 아니다.




내일은 집으로 귀향하는 날이다. 낚시의 천국이지만 곳에 따라 다를수 있다는걸 다시 배우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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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의 삶이 어언 3년을 훌쩍 넘어섰다.

사실 처음엔 이곳에 사는 사람들(한인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이 사뭇 다른데 거부감이 많아서 3년만 살고 한국으로 들어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왔는데 내가 거부했다. 이곳이 내가 살기에 적소임을 살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 사람들이 좋아져서는 아니다. 지금도 동화되지 못하고 거의 혼자 살아 가지만, 난 이곳이 좋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 갈수 있기 때문이다. 

텉밭에는 각종 채소가 자라서 식탁을 풍요롭게 하고, 꽃밭에는 각종 꽃들이 철따라 피고지고, 마당의 그늘에 않아 새소리에 취해서 콧노래도 흥얼데 보고,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고 이것들이 자라나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매일매일 감촉으로 느끼며 땀흘려 가꾸는 자연의 호흡을 함께 할수 있다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싸리나무(사실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다섯그루를 파서 옮겨 심었다. 내키만큼 자란 나무를 파서 옮기는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번 봄에 썬룸밑 공터를 그린룸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시작 했다. 아직 주문한 유리창이 오지 않아 미완성이지만 싸리나무가 창앞을 가려서 이것들을 집우측 마당으로 옮겨 심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자리엔 잔디씨를 뿌렸다. 그런데 이나무가 뿌리는 깊지 않고 옆으로만 뻗어서 뿌리를 많이 잘를수 밖에 없었는데 잘 살아갈지 의문이다. 나무마다 성질이 다르고 화초마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이를 따라 잡는 다는게 힘들수 밖에 없다. 지난달에는 나무에 주는 비료를 사와서 나무마다 밑둥에 한웅큼씩 주었는데, 블루배리가말라 죽어 버리고 개나리가 시들어 버리고 장미가 말라 비틀어 졌다. 수국도 몇그루 잎이 시들어 버렸다. 그때야 인터넷을 두들어 원인을 알아 보았으니 이놈들도 나를 만나 고생께나 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초봄에 비닐을 사와서 온실을 만들어 이곳에다 각종 씨앗을 키웠는데, 싹이 올라와서 좋아라 했는데 어느날부터 싹이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이다. 벌레가 먹나보다 했는데 한달이 지나고서야 비닐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튼튼하다고 너무 두꺼운 비닐을 사서 씌워 놓았으니 햇볕이 들지 않고 온도만 올라가니 썩어서 죽었음을 알았다. 다시 앏은비닐로 바꾸었더니 이번엔 잘 크고 있다. 오늘 여기서 싹틔운 데이지 달맞이꽃을 꽃밭에 옮겨 심었다. 할미꽃은 한주 더키워야 옮겨 심을수 있을것 같다. 

그나저나 다람쥐 때문에 보통 고민이 아니다. 화분이고 화단이고 닥치는데로 파헤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둘러 보지 않으면 화초가 남아 나질 않겠으니 말이다. 아무리 연구해도 다람쥐 못오게 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면 이놈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이또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이놈은 파해치고 나는 뒷수습하고 그러면서 사는게 답인거 같다. 

분재를 배우면서 꺽꽃이에 대하여 들은 상식데로 이것 저것 꺽꽃이를 해보는데 아직 한가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개나리의 경우 잘라서 모래에 심으면 뿌리가 내린다고, 아주 잘 산다고 들었지만 실제는 전부 말라 죽고 말았다. 그래서 모래와 분토를 섞어서 심어 보았지만 아직 사는것 같지가 않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지.


작년에 씨뿌려 튼튼하게 꽃피웠던 봉선화가 씨가 떨어져서 꽃밭에 여기저기 싹이 올라 오고 있다.

떠나간 님이 다시 온듯 그렇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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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inus에서 퍼온 글입니다.


미국 정부나 국민들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은 천양지차이다. 미국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구상에 미국만큼 좋은 나라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 정부나 국민들에 대한 견해는 이처럼 극단적으로 엇갈릴 수 있지만, 국립공원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자연에 대해서는 감탄과 부러움, 선망의 시선이 주를 이룬다. 기실 미국의 국립공원은 지구상에 태어나 딱 한번 살다가는 인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리스트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국립공원들은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절경만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 곳의 자연들은 우주에 대한 단상들을 불러 모으고, 무언지 모를 감동들로 가슴을 벅차게 한다. 때론 심오하기 짝이 없는 영감이 온 몸을 감싸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미국인뿐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온갖 나라에서 온 방문객들을 흔히 만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이언 국립공원


미국의 국립공원은 자연이 가져다 주는 이런 정신적, 물질적 풍요의 가치를 일찍이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됐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옐로스톤 국립공원)이 미국에서 탄생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18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옐로스톤은 전세계 국립공원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국립공원들이 옐로스톤의 관리 모델을 참조해 속속 지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옐로스톤은 국립공원 지정 이전부터 오늘날의 몬태나, 와이오밍 등을 비롯해 멀리 미국 중서부지역에까지 신비한 자연 현상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나다니엘 랭포드라는 사람을 필두로 한 몇몇 인물들의 초기 탐사로 본격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초기 탐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너무도 멋있고, 신비한 옐로스톤에 반해 이 땅의 사유화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모든 미국인의 땅이 돼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해 결국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미국의 국립공원 시스템의 탄생과 관련해 다소 흥미로운 점은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기구, 즉 국립공원관리국(NPS:National Park Service)은 옐로스톤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 한참 후인 1916년에야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는 옐로스톤, 요세미티 등이 일괄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따로따로 운영됐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국립공원 관리라는 측면에서 캐나다에 선수를 빼앗겼다. 캐나다의 국립공원관리국은 미국보다 5년 앞선 1911년 설립돼, 세계 최초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됐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국립공원에 대한 미국 정부, 나아가 미국인들의 사고는 이 공원의 수장 임명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일부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원관리를 총책임지는 자리는 어깨에 힘을 주거나 속된 말로 '빽'이 있는 자리가 못 된다. 그러나 미국은 이점에서 웬만한 여타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국립공원관리국장의 임명을 연방 상원의 청문과 인준을 거치도록 한 게 대표적인 예이다. 그만큼 비중을 크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립공원관리국을 공단이 아닌, 정식 연방 정부기관으로 지정하고 공무원들에게 관리를 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정부나 미국인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엄중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치스 국립공원


미국의 국립공원은 풍광 등 자연 그 자체로 볼 때도 그렇고, 행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매우 다채롭다. 2011년 현재 본래 의미에서 국립공원은 미국 전역에 걸쳐 58개 정도이다. 그러나 국립공원과 사실상 같거나 비슷하게 취급되는 곳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 예컨대 텍사스 주 남부 멕시코와 인접한 해안 같은 곳은 '국립해안'이라는 명칭으로 국립공원관리국이 운영하고 있다. 오대호 주변 지역에는 비슷한 원리로 '국립호숫가'가 있다. 눈요기라는 관점에서는 물론 한결 같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또 보통은 국립공원보다 훨씬 규모가 작기 마련인 국립기념물(내셔널 모뉴먼트)도 있고, 국립보존지역도 있으며, 국립휴양지역도 있다. 이들 모두가 국립공원관리국에 속해 있다. 또 이들과는 달리 연방 산림청이 관리하는 '국립산림'(내셔널 포리스트)도 대부분 경치가 아름답고, 캠핑 등이 가능하며 자연 학습을 하기에 적당한 곳들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


미국의 국립공원들은 한마디로 묘사하기에는 풍광이 서로들 너무나 딴판인 곳이 수두룩하다. 산 정상부에 일년 내내 눈을 이고 있는 알래스카의 국립공원부터, 엄청난 규모의 지질 역사를 보여주는 그랜드캐년, 정교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요세미티, 지구 상에 하나뿐이라는 독특한 늪지대인 에버글레이즈 등을 보라. 이들은 너무도 다른 풍광을 갖고 있지만, 한결같이 아름답다는 점이 유일하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이는 풍경 등에서 상대적으로 서로 차이가 크지 않은 한국의 국립공원들과 단적으로 대조되는 미국 국립공원들의 한 단면이다.

     

데쓰밸리


미국의 국립공원에는 물론 아름다운 풍광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곳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온갖 나무와 풀, 동물들이 신기하기만 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도 때로는 그의 일원으로서 족적을 남겼다. 북미 원주민들의 삶의 흔적을 그 어느 곳보다 국립공원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 문화, 역사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미국의 국립공원인 것이다.

      

그랜드케년 국립공원


국립공원 방문은 보통 차량 1대를 기준으로 1회 방문에 수십 달러 이하인 입장료를 내면 된다. 또 1년짜리 연회원권은 1백 달러도 안 되는데, 해당 1년 동안은 무제한으로 미국의 국립공원지역들을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패스는 1인 기준이 아니고 차량 기준이기 때문에 탑승자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또 만 62세 이상의 시니어들은 연회원권이 10달러 정도로 불과할 정도로 큰 할인 혜택을 받는다. 이와 함께 연방산림청이 운영하는 내셔널 포리스트(국립산림) 입장에도 이용할 수 있는 복합 패스도 있다.

       

세코이아 국립공원



미국 국립공원 여행을 백배 즐길수 있는 팁!

1. 미국 국립공원 여행의 시작은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미국 국립공원은 규모가 거대하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알차게 즐기기 위해서는 여행 시작 전 계획을 먼저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각 국립공원의 방문자 센터에는 국립공원 지도 뿐만 아니라 각종 안내서 등이 비치되어 있고 레인저들로부터 최고 여행 지점 및 안전 사항 등에 대한 문의 및 설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꼭 방문자 센터를 시작 지점으로 정할 것을 권한다.

아울러 국립공원 내에서 현대식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방문자 센터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2. 음식과 음료 및 스낵 등을 꼭 준비하라!

미국 국립공원 내에서는 식사를 사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나 음식점 등이 거의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간단한 음식만이 마련되어 있거나 또는 가격이 비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음식을 직접 준비해 가면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거나 하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어 국립공원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

3. 국립공원에 들어가기전에 자동차에 기름을 넉넉히 채워라!

미국의 국립공원들은 셔틀을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대개 규모가 거대하여 여기저기 국립공원 내를 둘러 보자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운전 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국립공원에 들어가기 전에 자동차에 기름을 넉넉히 채워 입장하는 것이 좋다. 국립공원 내에 주유소가 있다 할지라도 대체적으로 외부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며 국립공원 인근 주유소의 경우도 대체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함으로 공원 입장 훨씬 전에 적당한 곳에서 주유를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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